영적 무관심
영성신학에서 말하는,
소위 영적인 무지와 거짓,
오류와 불법으로 가득차 있으면서도
스스로 자기식의 의(義)와 혈기와
완고한 고집으로 교만이 충만한 사람들
중에는 도무지 변화를 싫어하며,
현실에만 안주하는 태도를 가진
사람들이 많다.
또한 지나친 현세주의와 기복주의,
극도의 인본주의인 세속화에
빠진 사람들도
지금 여기(here & now)에서의
변화를 거부하며,
자기식의 신관과 신앙관을 가지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뜻에 겸손하게
순종하지 않는다.
그래서 장터에서 아무런 생각없이
장례식 놀이와 혼례식 놀이를 하는
미숙한 아이들처럼 세례자 요한도,
예수님도 거부하면서 영적 무관심과
죄의 무감각과 감각상실증으로
살아가던 저 종교 율법적 사회의
기득권자들처럼 지금 이 시대
교회 안에도 이것도 싫고,
저것도 싫은 무감각, 무반응의 사람들
꼼짝달싹하지 않는 무리들이
있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성녀 파우스티나에게
이런 부류의 사람들의 마음은
마치 바위와 같이 견고하여
당신 은총의 단비도, 생명의 말씀도
도무지 흡수되지 않은 체
그냥 튕겨져 나가 버리는 사람들이며,
내가 이런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상에서 희생당했다는 것이
후회스럽다는 투의 안타까운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
숨은 붙어 있어도 외부의 자극에
반응하지 않으면 뇌사자로
판정되듯이, 죄를 지적해도,
복음의 기쁜 소식을 들려주어도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으면,
그 사람의 영혼은 죽어 있는 것이며
그러한 사람은 결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들은 회개를 외쳐도 무감각했고,
사랑을 외쳐도 무반응하는
영적인 측면의 뇌사자들과 같기
때문이다.
우리 자신들도 지금 여기서
참으로 영적인 일에 대해 민감하며,
죄를 알고 즉각 슬퍼할 줄 알며,
회개에 대해 민첩성과 신속성을
가지고 있는지 스스로에게
물어 보아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영적인 치유가
일어나야 하기에
회개의 성령의 도우심을 청하고,
기도와 금식을 통해
하느님께 대한 의식을 새롭게 하고,
그분께 가까이 가기 위해
말씀과 성체, 십자가 앞에서
의지적 노력을 기울여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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