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위령의 날
위령의 날’을 11월 2일에 지내는 것은 11세기에 클뤼니 수도원의 오딜로 원장이 다른 수사들과 함께 ’모든 성인의 날’ 대축일 다음 날
죽은 자를 위해 성무일도를 바친 일에서 유래한다. 그 후 이 관습은 일반 신자들 가운데 널리 보급되었으며, 라틴교회에서 정식으로 채택되었다.
이날 사제들은 세 번의 미사를 바칠 수 있도록 허락되었는데,
이는 15세기에 스페인의 도미니코회 수사들이 시작한 것이며, 1748년 교황 베네딕토 14세의 인준을 받은 후 유럽과 남미에 급속히 전해졌다.
위령의 날에 드리는 세대의 미사 중에서 사제는 한 대를 개인적인 지향으로, 또 한 대를 죽은 이를 위해,나머지 한 대를 교황의 지향에 따라 봉헌한다.
이 세 대의 미사전례 주제는 ’죽은 자를 위한 청원’이다.
이 주제의 배경에는 ’죽음의 엄숙한 현실’,’육신의 부활’,’그리스도의 심판’,그리고 ’영원한 생명’ 등 그리스도교의 가장 근본적인 교리 주제가 깔려 있다.
-꼰벤뚜알프란치스코수도회홈에서 www.ofmconv.or.kr
위령의 날
Commemoratio Omnium Fidelium Defunctorum
연옥 영혼들을 기념하는 것은 모든 성인의 축일을 보충하는 뜻으로 하는 것이다.
이 동안에는 특히 사도 신경의 "모든 성인의 통공을 믿으며"하는 구절을 기억하지 않을 수 없다.
광범위한 의미로서의 성인은 천당에 있는 영혼을 말한다. 이들은 모두 하느님의 사랑하는 아들이며, 또 서로 형제 자매가 되는 것이다.
다만 존재 상태가 다른 것이니, 천국에 있는 영혼은 영원한 복을 누리는 위치에 있고 세상에 있는 영혼은 악마의 유혹에 대항해 싸우고 있으며
은총 지위를 보존하여 공을 세워야 하고, 연옥에 있는 영혼은 곧 천국에 들어갈 처지에 놓여 있으면서 그때까지 보속 단련하는 것이다.
연옥 영혼도 상존 은총을 간직한 하느님의 사랑하는 아들임에는 틀림없다.
다만 그들이 임종할 때에 대죄는 없었지만 소죄라든지 혹은 용서를 받은 대죄의 잠벌(暫罰)이 있는 것이다.
성서 말씀으로 명백히 한 바와 같이, 천국에는 완전히 부채를 갚은자, 완전히 깨끗한 자가 아니면 들어갈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고행이나 기도로 유한한 잠벌을 보속하고 사후 즉시 천당에 갈 수는 있는 것이다.
연옥 영혼의 가장 큰 고통은 빨리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이다.
세상에 있는 우리는 그 고통을 충분히 이해할 수 없다. 우리는 물질인 육신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영적 감각에 둔한 것이다.
그러나 일단 죽어서 영혼이 육신을 떠나면 창조주이신 하느님만을 몹시 그리워하게 되기 때문에 그 곁으로 가지 못하게 하는 모든 장애물을 볼 때에 무한한 고통을 느끼게 된다.
이 고통은 하느님과 떨어져 있는 기간이 길면 길수록 더욱 심한 것이다.
만일 이런 고통 상태가 영원히 계속된다면 이는 곧 지옥일 것이나, 연옥의 경우에는 한도가 있을 따름이다.
또 이 기한은 다하지 못한 죄의 보속의 많고 적음에 따라서 결정 되는 것으로, 다른사람이 그 죄의 보속을 대신해 주면 그만큼 기간이 단축되는 것이다.
연옥에 있는 영혼은 자발적으로 보속 행위는 할 수 없다. 그에 반하여 현세에 있는 우리는 얼마든지 효력있는 속죄의 생활을 할 수 있는 처지에 놓여 있다.
그때문에 여러 가지 고행과 자선과 기도와 미사를 바치는 등으로 그들을 돕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축일은 매년 우리가 행하는 위대한 사업에 대한 반성을 촉구하는 데 그 진의가 있는 것이다.
교회는 "주님 연옥에 있는 영혼들에게 자비를 베푸소서"하는 열렬한 기도로 연옥 영혼을 위해 대신 하느님의 자비를 청한다.
가톨릭적 사랑의 정신에서 말하더라도, 자신을 도울 수 없는 자를 도와 주는 것이 큰 의무이기도 하다.
그리고 연옥 영혼을 위해 많은 공로를 쌓은 영혼이 훗날 연옥에 들어간 영혼이 그 은혜를 감사히 여겨 하느님의 대전에 은인을 위해 인자하심을 간청하기 때문이다.
연옥에는 하느님을 사모하는 고통 외에 또다른 고통이 있다 한다.
그 고통이 어떠한 것인지 주님께서도 가르쳐 주시지 않으셨으나, 아마 연옥에서 보속해야 할 죄악의 종류에 따라서 다를 것이다.
연옥 영혼을 생각할때 그들이 혹심한 고통을 달갑게 참아 견디고 있다는 것을 생각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하느님의 정의 때문에 그것이 반드시 필요한 것임을 안다.
자기가 받고 있는 벌도 당연한 것임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 그러므로 절망에 빠지지 않는다.
그들은 어김없이 천국에 들어갈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러한 고통 중에서도 위안을 느끼는 것이다. 물론 현세에서 처럼 다시는 상존 은총을 잃을 염려는 없다.
또 현세 사람들이 그들을 기억함이 곧 그들의 위로가 된다.
비록 현세에 친구, 친척이 아무도 없는 영혼이라도 모든 죽은 잘들을 추모하는 교회의 기도에는 그들이 다 포함되어 기억되는 것이다.
교회는 매일 그들을 위해 기도한다.
그렇기 때문에 신자들이 이날 성묘를 하며 사망한 친족들을 기억하는 정성에서 묘지를 깨끗이 꾸미고 그들의 명복을 빈다.
11월 2일이 주일인 경우 위령 미사를 드린다면 성무일도는 주일 것을 하고 위령 성무일도를 생략한다.
그러나 아침기도와 저녁기도를 신자들과 같이 바치는 경우에는 위령성무일도를 할 수 있다.
성 암브로시오 주교의 (형제 사티루스의 죽음)에서
(Lib 2,40.41.46.47.132.133: CSEL 73,270-274.323-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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