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말씀만 하소서
주일 아침 엘파소에서 미사를 하고
알바쿼키를 오는데, 자동차 밖의 온도가
화씨 105~106을 가리킨다.
이것을 섭씨로 환산하면 거의 35~36도이니
얼마나 더운 날씨인가?
토요일 저녁에 한국에서 돌아와 시차가 있고
피곤한데, 한달에 한번 있는 미사에
차량 봉사를 거리상 엘파소와 알바쿼키에서
교우들이 반반 해주니까 고마울 뿐이다.
강론을 준비하고 직접 강론을 하다 보면
늘 깨달음이 나중에 올 때가 있는데,
가장 중요한 것을 놓쳐서는 안된다는
성령의 영감일 것이다.
저녁 6시 반에 시작된 미사에서
강론이 다 끝나고 미사가 계속 진행되다가
영성체 시간이었다.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분이시니
이 성찬에 초대받은 이는 복되도다.
주님, 제 안에 주님을 모시기에
합당치 않사오니
한 말씀만 하소서. 제가 곧 나으리이다.'
바로 '한 말씀만 하소서' 하는 순간에
주일 복음 마르코 복음 4장 39절의
'잠잠해져라. 조용히 하여라!'
(Quiet! Be still!)는
말씀이 선포되는 것을 느꼈다.
갈릴래아 호수라는 우리네 삶의 터전에
부는 거센 돌풍과 호수 위의 교회를
상징하는 배안에 비록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하시며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는 상황에서도,
물이 배에 거의 가득 차는 것을 주님께서
허락하시는 이유가 무엇일까?
자연이 원래의 창조 질서와 목적을 엇나가
흉폭해진 것은 마르코 복음 5장에
나오는 게라사인 지방의 2,000마리
돼지떼 속에 들어간 '군대'라는 마귀가
예수님께서 자신한테 못오게
하기 위한 수작인데, 그것을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것이다.
이렇게 주님께서 자연 현상이 아닌
악령에 의한 타락한 자연을 허락하시는
경우도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이 모든 것을 초월하여
'권위있는 한 말씀'으로 제압하시는
주님이시라는 걸 드러내시기 위해서이다.
나는 아침부터 저녁 강론까지 우리가
몸 담고 있는 세상과 교회 안에 부는
거센 돌풍과 풍랑과 파도와 배안까지
들이치는 물결만을 묵상했었다.
그런데 영성체 때 초대의 말씀에 대한
응답의 경문을 읽는 순간,
바로 이 갈릴래아 호수도, 물이 가득 차
거의 죽게 된 상황에 놓여진 배도
나와 우리 모두의 마음이라는 걸
깨닫게 해주셨다.
주님께서 내 영혼의 핵인 심령에 이미
현존해 계시고, 새롭게 영적인 힘을
주시며 보다 더 하나되기 위해 오시는
그 주님께서
온갖 세상 근심 걱정과 두려움으로
가득찬 내 마음의 호수와
내 마음의 배에 이는 바람과 파도에
대고 명령하시는 것이었다.
전염병으로 생명의 위협을 겪고 있으며,
전염병과 가뭄으로
경제의 위기를 겪고 있고,
직장 문제로 생계의 위협을 겪으며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동요하고 있는 우리들의 마음에
주님께서 외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 모든 불안과 근심 걱정 뒤에는
주님과 함께 있어도 주님과 인간 사이를
이간질시키며, 주님 반대 방향으로
떨어뜨리려는 사탄과 그 졸개들의 계략이
들어 있는 것이다.
주님께서 함께 하고 있어도 믿지 못하고,
신뢰하지 못하는 인간의 과학적
합리주의와 실증주의적 사고방식이,
이 모든 상황을 허락하시고, 우리가
안고 있는 모든 문제의 해답과 해결책과
마스터키를 갖고 계시는
주님을 못보게 하고 못믿게 하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풍랑 속에서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하고 말씀하신다.
거센 돌풍과 출렁이는 파도와 배에 가득찬
물의 외연과 허세와 허상에 놀라
생명의 절대권을 가지신 주님을 놓쳐 버리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아야겠다.
'잠잠해져라. 조용히 하여라!'
'주님! 불신과 헛된 두려움의 제 마음에게,
온갖 분노와 절망의 제 마음에게
이렇게 명령해 주십시오!'
주님의 '한 말씀'은 권세요, 능력이시며,
생명력이요 운동력이시고,
변화와 치유를 가져오는 광선이시며
재창조의 힘이시기에
오늘도 '한 말씀만 하소서,
제가 곧 나으리이다'는 백인대장의
겸손어린 믿음의 기도를 영성체 때마다
믿음으로 외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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