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합/나의 이야기

영국& 따뜻한 마음

수성구 2021. 9. 12. 15:10

 

영국& 따뜻한 마음

the UK & warm heart 

 

 

7080 8090 가을노래 모음, 발라드모음,인기 히트곡 15곡, 가을냄새

지금은 따뜻한 햇살이 비치곤 한다

햇살만큼이나 우리의 생각도 따스히 살아갔으면 한다.

I hope that our thoughts will live as warm as the sunshine. 

그래서 사람이라면 누굴 만나든 어디를 가든지

마음 따뜻함에 우리의 행복을 누리고 싶어 한다.

살아 가는게 조금 힘이 드는 사람도 아니면 온갖 역경을

견뎌낸 사람도 자기만의 천국을 만들어 가지 않나 싶다.

I do not want to make my own heaven for those who are a little hard to live

 or those who have endured all kinds of adversity. 

그래서 누구 누구라고 핀찬을 주더라도 모든거 승화

시킬수 있는 넓고 편안한 마음으로 살아 가면 좋겠다 싶다.

이젠 우리들의 감정 싸움도 어쩌면 한단계 성숙해지는

우리들의 성장이라고 본다.

지나온 모든 아픔도 모든 시련도 다 부질 없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하루 하루 지나온 날도 돌아 가지 않고 보다 더 큰 마음으로 살아 가야 한다고 본다.

I think that all the pain that has passed and all the trials are not worthless,

 and I have to live with a bigger heart without going back the day after a day. 

오늘은 아침 일찌기 꾸리아 한다고 잠을 설쳐서인지 오후가 되니 노곤 한게

몸이 시들한다고 본다.

그래서 몇 안되는 간부들이 모여 꾸리아를 하고는 그렇게 미사에 들어 간다.

So a few executives gather to go to mass and go to mass. 

오늘의 미사는 우리 삐돌이 신부님의 거룩한 강론으로 미사를 드리게 된다

오늘 미사에는 그리 뼈저리게 깊은 강론이 아니라고 하지만

그래도 신부님의 열변에 우리는 귀담아 듣고는 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말씀은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야 하나 본다.

자신을 버린 다는거 어떠한 욕구 욕망을 버린다고 하는데 우리의

신앙에 열매를 맺는 충실한 믿음으로 존재 한다고 한다.

그렇게 미사 마치고는 우리는 율리안나와 우리 배데레사 형님을 만난다.

그래서 서로간의 인사를 하고는 헤어 지는데 황 율리안나가

예전에 비해서 많이 변했다고 한다.

그동안에 서울을 떠나 와서는 대구에 연고라고는 남편만 바라보고

살아 온건데 동네에 아님 성당에 친구가 없어서 마음 고생 많이 했나 보더라

In the meantime, when I left Seoul, I came to Daegu to look at my husband only,

 but I did not have friends in the neighborhood or the cathedral. 

나조차 율리안나를 멀리 했으니 요 ㅋㅋ 지지배 그동안에 마음에

담아 두었던가보다.

그래서 마음 고생한거 나한테 털어 놓고는 무슨 고해성사 보는거 같이

속이 시원하다고 한다.

그래도 한자라도 배운 놈이 생각이 깊다.

생각이 얕은 사람이면 나한테 누구마냥 고래 고래 소리를 질러서 푼다고 하지만

율리안나는 자기 부친이 과거에 서울에서 헬기 조종사 였다 한다.

If you are a shallow person, you will scream at me like a whale whale,

 but Julianna says that her father was a helicopter pilot in Seoul in the past. 

사고로 돌아 가시고는 율리안나는 대구로 시집을 왔단다.

서울에서 그래도 한양 대학 이라는 공부를 하던 놈이라서 생각이 깊다.

I still think that he was studying Hanyang University in Seoul. 

그러고는 오늘의 복음이랑께롱 그리스도는 고통받는 하느님의 종으로서

 그 십자가를 통하여 하느님의 구원계획을 이루시는 것인데 그 십자가를

 거부하는 것이 사탄의 일이며, 원수의 일이고 고소하는 자들의 일이기 때문에

 베드로에게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33절) 호통을 치신다. 마치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당신의 사명을 완수하기 전에 사막에서 사탄이 놀라운 메시아적

 기적들을 행하도록 했던 것이나, 십자가 아래에서도 그 옆에 있던 이들이 세 번이나 

십자가의 고통으로부터 내려오라고 했던 것처럼 베드로의 발언을 사탄의 일만 

생각하는 것이라고 책망하고 계시다(33절).

즉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을 끊고,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기며, 자신의 십자가를 

매일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그분을 따라야 한다고 하신다. 

자기 자신의 목숨을 즉 자기의 존재를 그분과 복음 때문에 잃어야 한다는 것이다(34-35절 참조). 

그렇지 않으면 헛되이 망할 것이라고 하신다. 

 

 

 

정식 국호는 그레이트 브리튼 및 북아일랜드 연합왕국(United Kingdom of Great
Britain and Northern Ireland), 일반 명칭은 영국연합왕국(United Kingdom)이다. 국명에서 보듯이 브리튼을
이루는 잉글랜드(England)·스코틀랜드(Scotland)·웨일스(Wales)와 북아일랜드(Nothern Ireland)로 구성되어
있다.

 

영국의 면적은 24만 3610㎢, 인구는 2015년 현재 6408만 8222명이며, 인구의 민족적 구분은
주로 잉글랜드에 거주하는 앵글로색슨족(Anglo-Saxon族)과 웨일스·스코틀랜드·북아일랜드에 사는 켈트족(Celt族)으로 대별된다. 공용어는
표준영어(King’s English)이나 켈트계의 겔릭어(Gaelic語)·웨일스어·콘월어(Cornish)도 사용된다.

 

종교는 영국국교회(Anglican Church, 50%) 외에 가톨릭(11%),
감리교(Methodism)(30%)가 신봉된다. 기후는 멕시코만류와 편서풍의 영향으로 북위 50°∼60°의 고위도임에도 따뜻하며 기온의 차도
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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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성 및 변천

 

영국은 서기전 55·54년 카이사르(Caesar)의 침공으로 로마의 속주(屬州)가 되어
브리타니아로 불렸다. 약 400년간 로마의 군정이 있은 뒤 앵글로색슨의 침공으로 6∼8세기에 7왕국시대가 있었으나 829년 통일왕국을 이루고,
1066년에 봉건국가 노르만조(朝)가 성립되었다. 1215년의 「대헌장(大憲章)」은 이 시대의 소산이다.

 

절대군주제는 엘리자베스(Elizabeth) 1세의 치세 이후 점차 쇠퇴하여 17세기 100년 동안의
내란으로 국왕이 처형되고 크롬웰(Cromwell, O.)이 주도한 공화정부가 들어섰으나, 그가 죽은 뒤에는 다시 왕정으로 돌아가 1688년
이른바 명예혁명이 이룩되었다. 이때부터 영국은 입헌군주제하에서 의회민주주의를 발전시켜 오늘에 이른다.

 

엘리자베스시대에 시작된 해외영토 확장은 18세기에 이르러 ‘대영제국(大英帝國)’을 건설, 그 위세는
19세기 말 빅토리아(Victoria) 치세 때 절정에 달하였다. 이즈음 우리나라에도 한영 수교의 기원이 발단되었다. 20세기에 들어와 치른 두
차례의 세계대전의 영향으로 대영제국은 ‘영연방(英聯邦)’으로 탈바꿈하여 사실상 붕괴되었다.

 

 

영국의 정치

 

영국 정치제도의 기본은 입헌군주제하의 의회정치이다. 국왕은 상징적·의전적 기능을 갖는 데
그치고, 복수 정당이 총선거에 참가하여 의회(하원) 내에서 다수 의석을 차지하는 정당이 집권당이 되며, 수상이 수반이 되어 대권을 장악,
행사한다.

 

하원은 소선거구제에 의해 선출된 659명의 의원으로 구성된다. 상원은 세습귀족·성공회 주교·법관 등으로
구성되며, 1910년 이래 여러 차례에 걸친 법 제정으로 그 권한이 극히 제한되어 하원에서 의결된 법안의 성립을 최대한 1년 기간 지연시킬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상원은 관습적인 전통에 따라 연합왕국의 최고재판소로서 기능하는 ‘국회법원(High Court of
Parliament)’의 권한을 행사한다. 영국은 거부권을 가진 국제연합 안전보장이사국으로서 자유진영의 지도적 국가이며, 유럽공동체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일원이다.

 

 

영국의 사회

 

영국은 전통적인 계급 또는 계층사회이다. 그러나 귀족·평민·상노와 같은 신분적 계층사회는
아니고, 출신·직업·교육 정도 등으로 가름하는 상중하의 계층이 있어서 그 각 계층은 다시 상중하로 3분된다.

 

상위층은 국왕·왕족·귀족 등이며, 중위층에는 ‘젠트리(gentry)’라는 중산계층이 있어서 그 폭이 가장
넓고 영국사회의 중심체가 되어 왔다. 이른바 ‘젠틀맨’이라 자부하는 계층이다. 하위층은 농업·어업·광공업·서비스업 등에 속하는
노동층이다.

 

19세기 중엽부터 20세기 초에 걸쳐 발전된 보통선거권, 노동조합을 주축으로 한 노동당의 집권,
교육기회의 확산으로 하류·노동계급의 사회적 지위가 크게 진작되었다. 영국은 사회보장제가 가장 잘 이루어진 나라 중의 하나이다. 16세기의
「구빈법(救貧法)」, 1908년의 무상노인연금제 등의 오랜 전통이 있어 왔고, 제2차세계대전 후에는 사회보장제도를 채택하여 이른바 ‘요람에서
무덤까지’의 사회보장이 성립되어 있다.

 

특히, 의료혜택은 전국민이 무료이며 병원은 공영화되어 있다. 영국은 세계에서 가장 전형적인 자본주의
경제체제를 갖춘 나라이다. 국제간 경제협력의 세계적인 추세에 따라 1973년 1월 유럽공동체에 가입, 경제와 산업은 유럽 가맹국들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영국의 경제

 

1975년부터 원유를 생산해 온 북해유전(北海油田)이 영국의 국제수지 향상에 밝은 전망을
던져주고 있으나, 에너지산업·제조업·국제무역·광업 등 모든 분야에서 정체와 부진을 거듭하고 있다.

 

1988년 당시 1인당 국민총생산은 1만 430달러이고, 국민총생산은 5929억 4600만 달러이었으나,
1997년 현재 1인당 국내총생산은 1만 9621달러이고, 국내총생산은 1조 2784억 달러이다. 그리고 1988년 수출은 1451억 달러였고,
수입은 1893억 달러로 해마다 무역수지적자를 나타내고 있었으나 1997년 현재 수출이 2540억 달러이고, 수입이 1903억 달러로
무역수지흑자를 나타내고 있다.

 

통화는 파운드(Pound)이다. 영국인의 경험주의적 현실주의의 국민성은 여러 분야에서 뚜렷하다.
벤담(Bentham, J.)의 공리주의, 리카도(Ricardo, D.)의 자유주의적 고전경제학, 피그(Pigue, C.)의 후생경제학,
케인스(Keynes, J.)의 고용이론 등 모두가 개인주의와 경험주의에 기초한다.

 

 

영국의 예술

 

경험주의적인 국민성은 예술 분야에서도 추상적인 음악보다 인간과 그 사회를 구체적으로 다룰 수
있는 문학에서 뛰어난 문호와 위대한 작품을 남기고 있다.

 

영문학은 고대영어시대부터 운문 문학에 특출하였으며, 셰익스피어(Shakespeare, W.)와 17세기의
밀턴(Milton, J.), 19세기의 바이런(Byron, G. G.) 등 낭만파 시인들과 엘리엇(Eliot, T. S.) 등 위대한 문인들이
많다는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산문문학과 18세기 이래의 수필, 20세기의 희곡 등에서도 세계문학에 공헌한 바는 지대하다.

 

한영관계사는 1883년의 수교 이전 영국선교사들의 전도활동, 영국군함의 거문도(巨文島) 상륙으로부터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다. 대한제국 때의 교역, 6·25전쟁 당시의 지원 등을 거쳐 1983년 수교 100주년을 넘긴 우방으로서의 관계를 맺고
있다.

 

광복 이전의 관계

 

(1) 광복 이전의 관계

 

우리나라와 영국과의 관계는 1845년 영국군함 사마랑호(H. M. S. Samarang號)가 거문도에
들러 그 섬을 ‘포트 해밀턴(Port Hamilton)’이라 명명하고 돌아간 것이 양국 접촉의 효시였다. 그 뒤 1882년 4월에 영국은
청나라의 중개로 윌스(Wills, G. O.) 제독과 한국 정부 사이에 ‘조영조약’을 체결하였다.

 

그러나 이 조약은 1883년 11월에 청나라의 중개를 거치지 않고 직접 한국과 교섭한 끝에 새로운 조약인
‘조영수호통상조약’으로 대치되었다.

 

1885년 4월 영국은 제정 러시아의 남하정책을 저지하기 위한 발진기지로서 갑자기 거문도를 점령하였다가
우리나라 정부의 항의와 영러관계의 정상화로 1887년 2월에 철수하였다.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자, 영국은 청나라 쪽으로 기울기 시작한
러시아에 대항하여 일본 쪽으로 기울게 되었고, 그 결과 1902년에 ‘영일동맹’이 맺어졌다.

 

이는 1904년에 일어난 러일전쟁에서 다시 일본이 승리하자, 영국은 동북아시아에서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하여 일본과의 관계를 더욱 돈독히 할 필요를 절실히 느꼈고, 다른 한편 일본으로서도 러시아와의 싸움에서 승리를 거두고 곧이어 한국을
식민지화하는 데에는 영국과의 동맹관계 수립이 국제적 호응을 얻는 데 용이하다는 이해관계가 일치한 때문이다.

 

1910년 이전에 자국의 이익의 보호를 위하여 일본의 한국지배를 묵인하는 태도를 취하던 영국은 경술국치
후, 특히 3·1운동을 전후하여 일본의 관헌에 의한 전제적이며 반동적인 무단통치에 점차 비판적 자세를 취하게 되었다.

 

또한, 일본의 만주파병을 계기로 반일(反日)로 선회하여 1921년 영일동맹을 폐기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반목추세는 1930년대의 중일전쟁으로 더욱 굳혀졌고, 1941년 12월 일본의 진주만 공격으로 영국과 일본은 교전국이 되었다.

 

제2차세계대전 종결을 목전에 둔 연합국 수뇌가 카이로에서 회동하였을 때 영국은 다른 나라들과 함께
우리나라의 독립을 약속하였다. 영국은 우리 나라와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한 뒤 곧 각종 이권, 주로 광산채굴권 획득 공작에 나섰는데
영평사금광(永平砂金鑛)·은산금광(殷山金鑛) 등이 그것이었다.

 

한편, 홍콩 등지를 본거지로 한 영국계 상사들(怡和洋行, 廣昌洋行)이 한국과의 교역 가능성에 착안하여
한국 진출을 여러 모로 꾀하였으나, 교역은 한국의 광산자원량의 부족, 일본상인들과의 경쟁, 상대할 한국상인의 결여, 유럽으로 수출할 가치가 있는
한국상품의 빈약 등의 이유로 극히 부진하였다.

 

다시 말하여 1894년부터 1910년 사이에 한영 양국의 교역이 제법 활기를 띠는 듯하였으나, 그 규모는
상대적으로 미미한 것이었다. 이 시기에 한국이 영국에서 들여온 수입상품은 일본·중국 등지에서의 수입품을 합친 총수입량의 20% 정도에 머물렀고,
영국에의 수출은 총수출량의 0.04%에 불과하였다.

경술국치 이전까지 영국이 관심을 가졌던 이권 또는 교역품은 광산 외에 재봉틀(싱거), 인천의 연초공장,
유류, 서울의 상수도 등 광범위한 것이었지만, 결국 경술국치로 치명적인 타격을 입어 광복 때까지 부진을 면하지 못하였다. 경술국치 전 양국의
교역은 현재(1985) 가격으로 약 7000만 달러에 달하였으며, 이것은 1960년대 교역량의 추세와 비등한 것이었다. 그러던 것이
1930년대에는 극히 축소되어, 영국인들은 일본인에 의해 한국시장으로부터 완전히 축출당하였다.

 

1945년까지의 영국은 주로 동북아시아에서의 자국의 권익보호와 제한된 교역이라는 목적을 가지고
우리나라와의 관계를 유지하였다. 그 뒤에는 주로 교역대상국으로서의 관심을 높여왔다.

 

6·25전쟁이 휴전으로 일단락된 이후에는 한국에 대한 군사적 관심이 사실상 줄어들고 동북아시아 지역의
안전보장의 일차적 책임을 미국에게 위임한 결과가 되었다.

 

 

광복 이후의 관계

 

(2) 광복 이후의 관계

 

제2차세계대전이 끝난 뒤 우리나라와 영국의 관계는 1945년 12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미국·영국·소련의
외상회담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이 회담에서 영국은 한반도 신탁통치안에 찬성하였다. 그러나 그 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을 때 즉각 승인하였으며,
곧 이어서 6·25전쟁이 일어났을 때는 유엔군의 일원으로 참전하였다.

 

6·25전쟁 발발 전 당시의 주한영국사절이었던 홀트(Holt)는 남북한간에 전쟁이 벌어지면 남한은 수세에
서게 되고 하와이에 망명정부를 세우게 될 것이라면서 한국정부 지지는 영국의 국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비판적인 견해를 나타내었으며, 영국
군부에서도 같은 정세관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북한의 남침이 있자 영국 정부는 미국의 파병요청에 군부의 반대를 무릅쓰고 미국 다음가는 큰 규모의
군대를 한국에 파병하였다. 전쟁 발발 직후 항공모함·순양함·구축함으로 구성된 함대를 한국해역에 급파하였으며, 이어 지상군을 파견하였다.

 

1951년 4월 임진강에서 영국군 글로세스터셔(Gloucestershire) 여단이 중공군 2개 사단과
대적, 승리를 거둔 것은 세계전사에 기록될 만한 것이다.

 

휴전 이후 1954년 4월 제네바에서 열린 정치회담에서 영국은 “남북한의 발언권이 인구비례에 따라야 하고
중립국관리의 선거감독을 받아야 한다.”는 입장을 밝힌 것을 비롯, 유엔 등 국제무대에서 한반도문제 거론 때마다 한국측 입장을 지지하여
왔다.

 

한국과 영국의 외교관계는 1949년 1월 18일 수교합의가 이루어진 뒤 그 해 3월 주한영국대사관이
설치되었고, 1950년 2월 주영한국대사관이 개설되었다. 이후 양국간에는 인적 교류가 활발하였으며, 1986년에는 전두환(全斗煥) 대통령과
대처(Thatcher) 수상의 정상교환방문이 있었다.

 

전두환 대통령은 그 해 4월 유럽4개국순방 도중 7일에서 10일 사이의 3박4일 일정으로 영국을 방문,
8일에 엘리자베스(Elizabeth Ⅱ) 여왕과 오찬을 가지고, 이어 9일 대처 수상과 다우닝가 10번지 수상관저에서 양국정상회담을
가졌다.

 

전두환 대통령은 부총리 등 경제각료와 경제인연합회 회장 등 재계인사를 대동, 양국간의 교역증진에 역점을
두어 현지에서 6억 달러의 상담을 종결지었다.

 

한편, 대처 수상은 그 해 5월 3일 우리나라를 답방, 전두환 대통령과 제2차 정상회담을 갖고, 한반도의
평화정착을 위한 양국간의 외교적 협력문제와 상호교역 증진문제를 다시 구체적으로 논의하였다.

 

대처 수상은 이어 동경에서 열린 세계7개국 정상회담에 참석, 한국의 입장을 대변하는 활동을 해주었다.
1989년 11월에는 노태우(盧泰愚) 대통령이 영국을 공식방문하여 교역문제, 동구권의 변화에 대한 정세 등을 두고 광범한 현안문제를
논의하였다.

 

한영 양국간에는 사증(査證)면제협정(1969.11.), 항공업무에 관한 협정(1972.5.),
이중과세방지협정(1978.5.), 공업소유권보호협정(1978.2.), 투자보장협정(1979.3.), 문화협정(1982.4.), 과학 및
기술협력협정(1985), 과학기술협력에 관한 양해각서(1986.4.), 항공협정개정 및 방위산업협력 양해각서(1990.10),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에 관한 협정(1991.11), 이중과세방위협약(1996.10) 등이 체결되어 있다.

 

한국과 영국의 교역은 최근 10년 간의 교역량이 수교 후 90년 간의 수출입액을 앞질렀다. 특히,
1975년부터는 한국의 수출액이 수입액을 초과하기 시작하였으며, 1982년부터는 종전의 수출품 가운데 주종을 이루던 직물 외에도 선박수출에서
획기적인 증가를 보였다.

 

그러나 상품교역에서는 한국이 다소 유리하였으나, 해운·보험·운송·여행·이자·배당금 등 무형교역에서는
불리한 편이다.

1987년 한국의 대영국 수출은 15억 2542만 달러이고, 수입은 7억 달러로 수출이 2배
이상이었으나, 2015년 현재는 수출이 73억 9000만 달러이고, 수입은 61억 2700만 달러이다.

 

다음으로 한국과 영국 간의 사회문화적인 관계에서 손꼽을 수 있는 것은 영국문화협회(The British
Council)를 통한 한국의 영국방문 학계·문화계 인사들에 대한 지원, 유학 알선, 영국 정부의 지원에 의한 1970년 울산공대 설립 등이
있다.

 

그리고 문화교류를 보면 1975년 왕립셰익스피어 극단, 로열발레단의 한국공연, 1981년 이후
BBC오케스트라단·런던교향악단·런던필하모닉오케스트라단의 내한공연, 1984년 2월 ‘한국미술 5천년전’이 대영박물관에서 개최된 것 등이 특기할
만하다.

 

그 밖에 한국에는 1954년 한영협회, 영국에는 1956년 영한협회(Anglo-Korean
Society)가 설립되어 양국의 친선에 앞장서고 있다. 1988년 제24회 서울올림픽대회에는 선수 369명, 임원 135명, 모두 504명의
영국 선수단이 참가하였다.

 

한편, 영국과 북한과는 수교관계가 없는 상태이며 제29·30차 유엔총회의 한반도문제 결의안에서 공산측
안에 반대하였다. 다만 1991년 5월 런던 주재 IMO북한대표부가 설치되었다.

 

정부간 협정은 전혀 없으나 북한·라메트상사간 무역협정(1957.7.), 북한·엔토레스상사간
무역협정(1958.4.), 북한무역촉진위원회·영국무역회간 무역협정(1971.11.) 등이 있다.

 

양자간 무역규모는 1985년에 영국의 대북한 수출이 300만 달러이고, 수입이 300만 달러이던 것이
1992년은 대북한 수출이 1113만 달러이고, 수입이 50만 1000달러로 수출이 3배 가까이 늘었는 데 반하여, 수입은 6분의 1로 감소되고
있다. 영국은 석탄을 수출하고 시멘트·아연·카드뮴을 수입한다.

[Daum백과] 영국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영국도 알고 나면 무지 화려하고 깉이가 있고 좋습니다.

오늘도 주님과 성모님의 은총으로 하루를 보내고 있습니다.

Today, I am spending my day in the grace of the Lord and the Virgin. 

감사합니다, 건강하세요, 사랑합니다.

Thank you, healthy, I love yo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