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다른 시작
(김형옥 소화데레사 수녀 )
예기치 못한 작은 바이러스로 인해 우리의 일상은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당연하게 여겨오던 일들을 멈추고. 돌아보며. 삶의태도를 바꾸어
새로운 길로 나아가도록 초대 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나에게도 큰 변화가 생겼다.
오랜 시간 마음을 쏟으며 함께했던 공동체를 떠나야 했고.
이 시대의 요구에 기꺼이 응답하려는 수도회의 영성에 따라
생각조차 해 본 적 없는 양산 하늘공원에서의 새로운 소임을 시작하게 되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야 하는 아픔과 눈물을 위로하며
함께 기도하고. 마지막을 동반해주는 일이다.
어릴 적부터 나에게 무덤은 가까이 가기 두려운 곳이었고.
돌아가더라도 될 수 있으면 피하고 싶은 곳이었다.
이런 나에게 하늘공원은 내 생각을 내려놓고.
주님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하는 초대이기도 했다.
무덤 앞에 서면 아무도 피해갈 수 없는 죽음 앞에 겸손해지고
허락된 삶의 시간을 더 충실히 살아가게 한다.
산 이와 죽은 이가 공존하는 곳.
그래서 하늘공원에는 많은 이야기들이 있다.
아직도 다 못한 말을 가슴에 담고 매일 찾아오는 발길 속에 묻어나는 사랑.
정성스레 초에 불을 밝히고 . 손을 모으고.
사랑하는 사람을 기억하며. 함께 하는동안 표현하지 못했던 말들을
손편지에 고이 적어 전하는 고마움과 미안함.
결혼 청첩장과 입학. 취업 등 기쁨을 함께 나누면서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하는 역동성을 부여하기도 한다.
출근 첫날 신부님께서 하늘공원을 소개해 주시면서
우리는 교우들은 많은데 말이 없으신 분들이라 아주 조용하다고
농담으로 말씀하시면서 멈추어야만 보이고.
들을 수 있는 곳이라고 하셨다.
여백을 읽고. 사랑을 기억하는 곳.
바로 성사가 이루어지는 공간이다.
지금 하늘공원에도 가을이 익어간다.
잔디들 위로 붉게 물들어가는 단풍. 야생화들이 함께 어우러진 곳.
나는 매일 아침 도시락을 싸 들고 이 공원으로 소풍을 나간다.
평소 걷는 걸 좋아하는 나는 동기 수녀들의 부러움을 받으며
오늘도 묵주를 손에 쥐고 무덤을 돌면서 영혼들을 기억하며.
모든 성인의 통공과 영원한 삶을 믿으며 매일 새로이 봉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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