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합/주님의 향기

단 한번의 자비

수성구 2020. 10. 22. 05:00

단 한번의 자비

큰 부자가 살고 있었다.

그는 돈을 점점 더 모아들일 줄만 알았지 그밖의 다른 일에는 전혀 무관심했다.

더 많은 재산을 가지고 싶다는 한없는 욕심 때문에

심지어 그는 악마에게 자기 영혼까지 팔아넘겼다.

 

하루는 어느 가난한 사람이 대문을 두드리며 곡식을 한 되만 달라고 애처럽게 빌었다.

이제는 나이가 많이 들어 어느덧 노인이 된 부자는

자신도 죽을때가 다 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그 가난한 남자에게 말했다.

내가 죽고 나면 내 무덤가에 앉아 사흘 밤을 지켜 주겠다고 약속하시오.

내 그러면 곡식을 한 되가 아니라 열 되로 퍼주겠소.

남자는 부자에게 그리하겠다고 단단히 약속하고 열 되의 곡식을 받아 집으로 돌아왔다.

남자의 아내는 그 곡식으로 빵을 구워 아이들에게 먹일 수 있었다.

그러자 하느님께서 보시고 부자를 용서해 주셨다.

 

 

얼마 지나지 않아 구두쇠 부자가 죽었다.

가난한 남자는 약속을 잊지 않고 죽은 사람을 지켜 주려고 그날 밤에 무덤을 찾아갔다.

밤새 그는 죽은 부자의 영혼이 구원되기를 바라며 기도를 바쳤다.

그러다가 날이 밝아 오자 평안한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갔다.

 

 

첫날과 이튿날 밤에는 별다른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사흗날 밤. 마을 시계탑에서 자정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리자

어두운 수풀 속에서 갑자기 군인 한 명이 눈앞에 나타났다.

가난한 남자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행여 목숨을 잃지는 않을까 두려워했다.

그 군인은 다름 아닌 하느님이셨다.

 

밤을 세워 무덤을 지키는 그를 도우려고 몸소 나타나신 것인데.

그는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군인은 가난한 남자에게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물었다.

돌아가신 분이 살아 있을 적에 그분이 죽으면 사흘간 그 무덤을 지키기로 약속했습니다.

지금은 그 약속을 따르고 있는 중입니다.

 

제가 찢어지게 가난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을 때.

살림이 넉넉한 그분에게 가서 구걸을 했지요.

그분은 저에게 많은 곡식을 베풀어 줄 정도로 아주 어진 분이었습니다.

그 곡식이 아니었으면 제 처자식은 아마도 그때 굶어 죽었을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 여기서 무덤을 함께 지킵시다.

군인은 이렇게 말하며 가난한 사람과 밤을 세웠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어둠 속에서 무언인가 부러지고 버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느닷없이 악마가 튀어나와 두 사람 앞에 섰다.

그리고 죽은 사람을 내놓으라고 했다.

죽은 사람이 살아 생전에 자신에게 영혼을 팔았기 때문이라고 악마는 말했다.

 

군인이 대꾸했다.

여기 이 항아리가 보이는가?

네가 이 항아리를 금으로 가득 채우면 부자의 가여운 영혼을 너에게 주겠다.

그 말에 악마도 동의하며 곧장 그 자리를 떠났다.

그사이 군인은 재빨리 항아리 밑동을 개서 절벽 위에 서 있는 나무 위에 걸어놓았다.

악마는 금화를 두 자루나 잔뜩 암아 와서는 항아리에 쏟아부었다.

군인은 그 정도로는 항아리를 채울 수 없다며 악마를 야단쳤다.

그러자 악마는 또다시 어디론가 사라졌고 이번에는 더 많은 금화를 자루에 담아 왔다.

하지만 그걸로 넉넉할 거라고 생각한 악마의 기대는 허사가 되었다.

금화가 죄다 절벽으로 떨어져 버린 까닭이다.

악마는 손수레로 금화를 몇 번이고 실어 날랐다.

그럼에도 항아리는 여전히 채울수 없었다.

 

 

날이 밝아 첫 햇살이 비쳐오자 악마는 그 자리를 떠나야 했다.

그렇게 하느님은 부자의 영혼을 구원하셨다.

이 세상에 사는 동안 단 한 번 그 부자가 자비롭게 행동한 까닭이다.

 

(에스파냐 동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