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작 한 다발
(김준호 신부}
꾸르실료 강의를 마치고 원로 신부님들과 파견미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막 제의를 입으려 할 때 안내실직원이 들어왔다.
신부님. 본당에 병자성사 신청이 들어왔답니다. 빨리 오시랍니다.
병자성사? 가만있자. 누가 돌아가시려 하나?
마리아 씨도 아직은 괜찮고. 바오로 할아버지는 어제까지 괜찮았고.
시몬 형제도 어제까지 괜찮았는데...
어제 방문했던 교우들을 기억하면서 나는 손가락으로 세고 있었다.
옆에서 그 모습을 보고 계시던 원로 신부님이 큰 소리로 나무라신다.
아니. 이사람아. 종부가 났다는데 빨리 가지 않고 뭐 하는가?
익은 감도 떨어지고 땡감도 떨어지는 법인디
자네가 뭔데 사람을 손가락으로 세웠다 뉘었다 하는가?
당장 뛰어가게.
나는 옷을 갈아입고 제의방을 나오면서도 고개를 갸웃거리며
손가락으로 세웠다 뉘었다 헤아렸다.
본당에 도착하니 생각하지도 않도 공소회장의 부친이 돌아가셨다고
사무장이 일러주었다. 공소로 사용되고 있는 회장님 댁에서 장례미사가 봉헌되었다.
요한 할아버지를 모시고 살던 큰며느리 아가다 자매가
미사 내내 혼자 중얼거리면서 서럽게 서럽게 큰 소리로 운다.
자세히 들어보니. 아이고 그놈의 장작 한 다발. 장작 한 다발 하면서 울고 있었다.
미사를 마치자마자 나는 아가다 자매에게 물었다.
아니. 아가다씨 무슨 소리여. 장작 한 다발이 무슨 소리여.
장작 한 다발이 죽었단 말이여?
미사 중에 분심 들어 혼났구먼.
신부님 들어보이소잉...하고 아가다 자매가 코를 한번 팽 푼다.
그리고 아이고오. 그놈의 장작 한 다발 한마디 더 하더니만 이야기를 풀어간다.
신부님. 이리 와 보이소잉.
나를 집 뒷마당으로 끌고 간다.
그리고 뒷마당에 층층이 쌓아 놓은 장작더미를 보여 준다.
늦가을. 한창 추수철인 시골은 바쁘다.
논이나 밭으로 새벽에 나가서 밤늦게 집에 돌아온다.
그날도 아가다 자매 부부는 일찍 논에 가려고 이것저것 챙기고 있는데
저쪽 방문이 열리면서 시아버지가 한마디 건넸다.
얘야. 방이 식었다.
나가기 전에 장작 한 다발만 지퍼주고 가거라.
아가다 자매는 시아버지 말씀에 예..하고 대답하고는 깜박 잊어버리고
그냥 논으로 나갔단다. 온종일 일하고 밤늦게 집에 돌아와 보니
시아버지가 그 식은 방에서 돌아가셨다는 것이다.
신부님 보세요. 봄부터 여름 내내 이 가을 다 되도록 장작을 모아서
이렇게 쌓아 놓았는데. 이놈의 장작 한 다발 못 떼드리고 그냥 보냈으니
어떡한데유. 어떻한데유. 아이고 그놈의 장작 한다발. 한 다발...
아가다 자매는 또 닭똥 같은 눈물을 훔친다.
대갓집 맏며느리로 평소 효부라고 소문이 자자하던 아가다 자매는
정말 서운할 법도 했다.
아가다 자매님. 걱정하지 마셔.
천당에는 스팀 들어와. 스팀. 난방시설이 잘 되어있어서 무지 따뜻해요.
걱정하지 말아요. 하고 위로해 줬지만.
아가다 자매는 평생 그놈의 장작 한 다발을 잊지 못할 것이다.
사람은 큰일에는 실수하지 않는다.
오히려 작고 사소한 일로 큰일을 그르치는 경우가 허다하다.
아무 뜻 없이 내뱉은 말한마디가 상대방 가슴에 비수처럼 꽃혀
평생의 한을 남기기도 한다.
아무렇지도 않게 한 행동이나 한 마디 말이 남편에게나 아내에게
그리고 자녀에게 큰 상처를 주는 경우가 허다하다.
보잘것없는 장작한 다발이 아가다 자매에게 평생 한이 되었을 것 같다.
하긴 큰 바윗돌에 넘어지는 놈 없다.
작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는 법이다.
'백합 > 주님의 향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고요를 즐기다 (0) | 2020.10.11 |
---|---|
한 가지 은총에 충실하면 또 다른 은총을 받는다 (0) | 2020.10.10 |
신부가 치른 곤욕 (0) | 2020.10.09 |
어머니가 가르쳐 준 노래 (0) | 2020.10.08 |
가두선교. 이런 짓 왜 하냐! (0) | 2020.10.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