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를 즐기다
고요를 즐기다
(주름을 지우지마라 중에서 이제민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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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이나 친구들이 찾아오지 않으면 불안을 느끼며
외로움을 타는 노인들이 많다. 하지만 노인의 경지에 들면
술과 노래와 떠들썩한 어울림이 인간의 마음을 채워주지 못한다는 것을 안다.
그는 몸에 익힌 인내와 자기희생으로 외로움을 너그러움의 덕으로 승화시킬줄 안다.
인내와 자기희생과 너그러움의 덕을 쌓지 못한 젊은이가 노인보다 더 외로울 수 있다.
병약한 노인은 지속적인 관심이 필요한 것이 사실이지만
외로움을 달랜다는 명목으로 떠들썩한 소리로 그들의 마음을 채우려 하는 것은
자칫 늙음에 대한 결례일 수 있다.
그들의 고요를 깨뜨리기보다 그들의 고요 속으로 스며들면서
그들의 고요를 듣고 그들의 고요를 사랑해야 한다.
하느님께 귀 기울이듯 그들에게 귀 기울일 때 하느님의 음성처럼
그들의 마음이 들려올 것이다.
또한 하느님이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시던 순간에
가까이 다가선 그들에게서 진한 외로움 대신 삶의 의미를 발견한
참 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
고요 속에서 평온을 느끼고 내가 주는 기쁨이 아니라
그들이 나에게 주는 기쁨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흥에 겨운 분위기가 주는 기쁨과는 다른 차원의 기쁨을 맛보게 될 것이다.
노인을 외롭고 딱한 존재로만 여기며 위로하려 들던
자신을 부끄러워 할 것이다.
노인의 고요는 그들이 평생 쌍은 덕이다.
그들의 고요는 하느님 현존에 대한 믿음을 나이와 함께
다시 확신하게 된 것과 관련이 있다.
인생의 긴 여정은 이 현존을 체험하기 위해 주어진 시간이다.
하느님의 현존에 대한 믿음을 가진 자는 혼자가 아니기에
결코 외롭지 않다.
역으로 말하면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하지 못한 자는
나이에 상관없이 외로울 수밖에 없다.
십자가에 달려 사투를 벌이는 예수님을 누가 외롭다고 할 것인가.
아들의 죽음을 바라보는 어머니 마리아를 누가 외롭다 할 것인가.
정작 외로운 인생은 하느님의 현존을 느끼지 못하고 그분의 죽음을
불쌍한 눈으로 지켜보는 군중이다.
그분과 함께 하지 못하는 인간. 그분과 함께하신 하느님을 느끼지 못하는
인간이 사실은 외로운 존재다.
그런 면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느끼며 그 안에서 쉼을 얻은 노인은
진짜 외로움이 무엇인지를 깨우쳐 주는 인생의 스승이다.
죽음에 가까워 고요해진 노인에게서 생의 원천에 근접해 있는
인간의 원초적 마음을 만난다.
노인이 되는 것은 삶의 원천으로 돌아가는 것이고.
노인을 만나는 것은 한 인간의 늙은 모습이 아니라
내면의 깊은 곳에 묵직하게 흐르는 삶의 신비에 들어가는 것이니.
노인을 존중하는 자만이 자신의 원천에 충실하게 인생을 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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