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합/주님의 향기

저는 문둥이 아들입니다.

수성구 2020. 9. 19. 05:10

저는 문둥이 아들입니다.

(김준호 신부)

 

 

카시미론 이불집 아저씩 같은 수더분한 인상의 신부.

세례명이 가시미로라서 내가 그렇게 불렀다.

그는 성아우구스띠노수도회 소속인데 나보다 훨씬 후배다.

필리핀 팔라완섬에서 선교하다가 우리 본당을 찾아왔다.

그곳 주일학교 아이들에게 체육복을 마련해 주고

가난한 교우들의 집을 고쳐주고 싶다면서 모금할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래서 주일날 가시미로 신부가 교중미사 중에 강론을 하기로 했다.

 

 

가시미로 신부는 정성스럽게 미사를 시작했고.

어려운 부탁의 말을 해야 할 시간이 되자 또박또박 차분하게 강론을 시작했다.

지금은 두 분 다 돌아가시고 계시지 않지만.

제 부모님은 문둥이였습니다.

듣기 좋은 말로 나환자. 더 좋은 말로는 한센병이라고 하지요.

그래서 저는 문둥이 자식입니다.

문둥이 자식이라서 신부도 못 되는 줄 알았는데.

저 같은 사람도 하느님께서 불러주셔서 수도원에 들어가

세제품을 받고 지금은 저 외지의 섬에서 선교사업을 하고 있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놀라운 마음에 커다란 슬픔덩어리가 울컥 솟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가시미로 신부가 나환자 정착촌 출신인 것을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그래도 그렇지. 나는 그렇게 말하지 못할 것이다.

내 부모가 아니라 친척이라 해도 만일 그가 나환자라면

나는 솔직히 그 말을 못할 것 같았다.

그런데 그 신부는 솔직하게

나의 아버지 어머니는 문둥이라고 말한다.

나는 문둥이의 자식이라고.

어떻게 자기 자신에게 저렇게 말할수 있을까?

 

 

내가 나섰다.

나는 신자들에게 가시미로 신부의 고백 앞에서

그순간 내가 느낀 바를 말했다.

내가 같은 경우라면 부모에 대해서 저렇게 솔직하지 못할 것 같다고.

후배 신부지만 마음 깊이 존경한다고 했다.

 

아무튼 후원금이 예상보다 훨씬 많이 나왔다.

많은 신자가 감명을 받고 좋은 일 하는 신부님을 돕고자 많은 후원을 해줬다.

 

 

무엇보다도 진솔했던 신부님의 말씀과 모습에

큰 감명을 받았던 것이다.

카시미론 신부는 지금 어디에서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보고 싶다.

 

 

(김준호 신부의 책 주노신부 장개갔다네...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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