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합/주님의 향기

금년에 지은 죄

수성구 2020. 9. 1. 06:54

금년에 지은 죄

금년에 지은 죄

(김준호 신부)

 

 

교구청에 살다 보면. 그래도 인기 좋은 때가 딱 두 차례 있다.

대림 시기와 사순시기다. 여기저기. 이 본당 저 본당에서

판공성사 도와달라고 요청이 온다.

그때 한번 배짱을 부린다.

좀 쩨쩨할는지 모르지만. 먼저 손가락으로 헤아려 본다.

가만 있자. 작년에 그 신부님이 수고비를 얼마 주었더라?

(오해하지 마시라. 이건 순전히 우스갯소리다)

 

 

어느 본당에서 있었던 일이다.

늦도록 고해소에 앉아있으려니 발가락에 쥐가 날 지경이었다.

끝났나 싶어 일어나려면 또 들어오고. 또 들어오고...

몸이 배배 뒤틀렸다.

어휴. 이제는 그만 일어나야겠다.

내가 몸을 막 일으키려는 순간.

어느 자매가 헐레벌떡 뛰어 들어왔다. 얼마나 달려왔는지

숨을 헐떡이며 말까지 더듬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씩씩 거리면서

간신히 성호를 긋는 듯하더니

신부님. 저 금년에 지은 죄. 싸아악 다 깨끗이 씻어주이소잉.

그런 줄 알고 갑니당. 뛰다시피 들어온 그 속도로 다시 휭 나가버렸다.

`어허`

 

 

순간 멍했다.

그래도 빙긋이 웃음이 나왔다. 그날 성사 본 벽여 명 교우들중에

그 자매가 제일 잘 봤다고 생각했다.

 

 

 

 

고백의 내용을 이 핑계 저 핑계. 요리조리 피해 간다든지.

아니면 순전히 남의 흉만 보다가 나간 사람들.

자기는 죄인이 아니고 다른 사람이 다 죄인이라고 고백한 사람들은

마음이 개운하지 못할 텐데.

그 자매만큼은 편안한 마음으로 두 다리 쭉 뻗고 잠들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신부님이 금년에 지은 죄 깨끗하게 다 씻어주셨다...

하고 딱 믿었을 테니 말이다.

 

 

하나 더. 어떤 점잖은 신사가 고해소에 들어왔다.

내가 들어도 고백하는 내용이 대충이다.

신부님. 오늘은 이 정도로 하고요.

다음에 정식으로 다시 볼랍니다.

 

 

엥? 무슨 소리를 하십니까?

아니. 무슨 성사가 정식이 있고 비정식이 있다요?

내가 벌컥 물었다.

 

 

밖에 사람들이 너무 많이 기다리고 있어서요.

조금만 늦게 나가면. 지금 고해소에 들어간 사람이 누군데.

무슨 죄가 그리 많아 이렇게 늦게 나온다냐 하고 다 쳐다봐요.

 

 

그는 다음에 반드시 벙식으로 보겠다고 사정하다시피

말하고는 나가버렸다.

글쎄. 그 형제가 고해성사를 다시 봤는지는 모르겠지만.

판공성사 때마다 줄지어 기다리는 시장통 같은 모습은

뭔가 잘못된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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