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합/주님의 향기

배씨 할아버지

수성구 2020. 8. 11. 05:03

배씨 할아버지

배씨 할아버지

(주름을 지우지 마라 중에서 이제민 신부)

 

 

명례 언덕에 온종일 비가 내리던 어느 봄날 이른 아침.

작년 여름 큰비에 무너져 내린 종탑 아래 언덕이 무사한지 둘러보기 위해

집을 나서는데. 그 언덕 아래 사시는 배씨 할아버지가 문밖에서

나를 기다리고 섰다가 반색하며 다가오셨다.

하실 말씀이 있어서 벌써 다섯번 째 올라왔노라 했다.

죄송한 마음에 문을 두들기시지요...했더니 기도하는 데

방해가 될까 봐 밖에서 기다렸다고 한다.

들어가서 차 한잔 하자는 권유도 마다하며 지나치도록 예의를

차리시는 모습에서 할아버지의 전 생애가 피부로 느껴졌다.

 

 

새벽부터 몇 번씩이나 헛걸음하며 나를 기다려 꼭

드리고 싶었던 말씀은...일기예보에 의하면 오늘 비가 많이 온다고 하는데

성당 언덕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자기 집 마당으로 쏠리지 않도록 해 달라는 부탁이었다.

작년 여름 큰비로 축대가 무너져 내린 이후 아직 온전하게 보수를 하지 못해

비가 조금만 내려도 걱정인 모양이었다.

안 그래도 어제 물이 할아버지 집으로 흐르지 않도록

물고랑을 쳐 두고는 지금도 그것이 걱정이 되어 둘러보러 나가던 참이었다.

 

 

그 일이 있은 며칠 후.

아침 일찍 할아버지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현관문 앞에 작은 선물을 하나 갖다놓았으니 드시라는 것이었다.

드렁크 한 박스가 문 앞에 놓여 있었다.

할아버지는 이번에도 내 기도시간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

조용히 갖다놓았다고 했다. 부끄러웠다.

일전에 할아버지가 홍수로 당신 선친의 묘소가 망가졌다며

성전 마당의 잔디를 좀 캐 가고 싶다기에 원하는 대로

가져가시라 했더니 그에 대한 답례인 듯 했다.

 

 

 

 

작은 키에 몸집마저 왜소한 아흔이 막 넘은 할아버지는

이 마을에서 가장 연장자시다.

한 살 아래 할머니와 단 두 분이 사시는데

건강하시어 자전거를 타고 나가서 장도 봐오고 집안일도 도맡아 하신다.

거동이 불편한 할머니는 할아버지가 빨래며 요리며

청소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자신을 공주처럼 돌보아주는 것을

기쁜 마음으로 즐기신다.

 

 

햇볕이 따스하게 내리쬐던 어느 날.

할아버지 집 마당에 들어서니 할아버지가 막 할머니의 머리를 자르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젊었을 때 동네 이발사였다.

그 광경이 참으로 아름답게 보여 사진이리라도 한 장 남기고 싶었지만

사진기를 가지고 있지 않아 아쉬웠다.

 

 

할아버지는 열여섯 살에 이웃마을 초동에서 이곳으로 이사를 오셨는데.

연세가 많아질수록 초동이 그리워지는지

그 연세에도 40리가 넘는 초동 마을을 가끔씩 자전거로 다녀오신다.

할아버지는 초동에서 마지막 여생을 보내고 그곳에 묻히고 싶어서

백 평이 넘는 묘지도 마련해 놓았따고 했다.

떠난 지 아무리 오래 되었어도 잊지 못하고 그리워하는 것을 보면

고향에 대한 향수는 인생 늦게 더 절실히 다가오는 모양이다.

그래서 인생의 마지막에 천국을 더 그리워하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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