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바라 할며니
발바라 할며니
(주름을 지우지 마라 중에서)
이제민 신부
나는 2011년 초부터 밀양과 김해를 잇는 나루가 있던
경남 밀양의 변두리 명례 언덕에 올라 살고 있다.
낙동강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는 순교자 신석복 마르코(1828-1866)의
생가 터가 있고 바로 그 옆에 경상남도에서 가장 일찍 설립된
천주교 본당이 있다.
남녀 신자석을 구분하는 난간이 있는 조그만 성전은
목조 건물로 우리나라에 몇 남지 않은 오래된 형태다.
벽 쪽을 향한 제대와 그 위에 모신 십자가와 장미의 성모상은
초기 신자들의 신앙과 영성을 느끼게 해준다.
경상남도는 이 아담한 건물을 2011년에 경상남도 문화재로 지정했다.
거의 폐허나 다름없이 방치되어 있던 이곳은 무엇보다도 조용해서 좋다.
뜨거운 여름 어느 날.
90세가 넘은 발바라 할머니가 굽은 등을 유모차에 의지해 기다시피
명례 언덕 위로 올라오셨다.
성당 입구까지 겨우 올라와서는 굽은 허리를 하늘을 향해 쭈욱 펴들었다가
두 손으로 크게 하늘을 모아 합장하며 허리를 굽혀
성전 입구의 성모님을 향해 큰절을 올린 뒤.
다시 오른손을 하늘 높이 펴들어 이마에서부터 시작하여
크게 성호를 긋고는 얼마 전까지 축사였던 언덕을 휘둘러보다
나를 발견하고 한마디 던지셨다.
아. 참말로 좋다.
하느님이 하시는 일인데 안되는 기 있나!
할머니의 감탄사는 마치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나서
보시니 좋았다고 하신 말씀처럼 들렸다.
할머니는 열여덟에 명례로 시집와서 이 언덕과 함께 연륜을 쌓으셨다.
시집올 때 할머니는 신자가 아니었다.
시집와서 딸만 내리 여섯을 낳고 문중의 구박을 심하게 받았다.
그러던 차에 누군가에게 성당에 나가 하느님께 빌면
아들을 낳게 해준다는 말을 듣고 집안 몰래 성당에 다니며
예비자 교리를 마치고 세례를 받았다.
기도 덕분인지 할머니는 마흔이 넘어 아들 둘을 낳았다.
그래서 내가 기를 펴고 살았다 아이가...
나는 구약의 한나를 떠올리며 물었다.
마흔여석에 낳은 막내아들은 경찰이 되었다고 했다.
그렇게 신앙생활을 하는 동안 순교자의 생가 터는 축사로 변했고
성전은 파리 떼와 악취로 뒤덮였다.
성전 옆집에 신 씨가 산다는 것은 알았찌만
그들이 순교자 신석복의 후손이라는 것은 몰랐다.
그런 것 몰랐다고 신앙생활하는 데 방해를 받은 것도 아니었다.
할머니는 다만 성당 바로 옆에 축사가 들어서고 고약한 냄새가 진동해서
하느님께 미안하고 마음이 아파서 많이 울었다고 했다.
그런데 그곳이 순교자의 생가 터라고 하더니
어느 날 축사가 갑자기 이전해 갔따.
성당과 축사 사이의 담장이 허물어지고 질퍽했던 축사 바닥에
잔디가 깔리면서 주변이 아주 깔끔하게 정리가 되었다.
냄새와 파리 떼도 사라졌다.
하모. 하느님이 하시는 일인데 안되는 기 있나.
하느님이 다 알아서 하신다 아이가.
하느님이 소들을 다 후드까내고(쫓아내버리고의 경상도 방언)
다시 사들이신 거 아이가
할머니는 축사로 변했다가 다시 성전으로 아름답게 꾸며지는
과정을 하느님이 하시는 일이라 여기며 감탄하셨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늙음이 지혜를 낳는구나!
할머니의 지혜로운 감탄 앞에서 얄팍한 머리를 굴리며
성전을 조성하려고 애써는 나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하느님이 다 알아서 하신다는 한마디로 할머니는
내게 이렇게 충고하는 것 같았다.
성지조성은 인간이 아니라 하느님이 하시는 일이다.
하느님이 일을 하시도록 하라.
네 노력과 능력으로 이룰 수 있따고 생각한다면 너는
바벨의 탑을 쌓고 있는 것이다.
교만으로 일군 성지에서 어떻게 사람들이 평온한 마음을
얻을수 있겠는가. 성전은 평화의 마음으로 가꿀 수 있따.
하느님이 모든 일을 하신다는 복음을 네 몸을 통해
사람들이 느끼도록 하라..
늙음을 통해 얻은 지혜.
하느님이 다 알아서 하신다.
지나고 보면 하느님께서 하시지 않은 일이 어디 있는가..
할머니의 신앙에 감탄하며 생각에 잠겨 있는데
할머니의 또다른 말이 내귓가를 울렸다.
이 좋은 땅을 마음껏 즐기다가 가면 얼마나 좋겠노.
즐길 만하게 꾸며지니 가야 하네.
늙은 기 아깝다...
할머니의 삶을 통해 인생이 은총임을 배운다.
늙음은 세월의 흐름을 넘어 인생이 은총임을 깨닫게 해준다.
늙어서도 인생이 은총임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자기의 인생을 내려놓지 못한다.
인생이 은총이라는 것을 할머니는 어떻게 깨달았을까?
늙음에는 평생을 두고 축적된 인내와 희생이 바탕을 이루고 있다.
인내는 인생에 감춰진 보물을 발견하게 하고.
희생은 늙음을 신비롭게 한다.
인내와 희생은 젊은 혈기로 추구하던 부와 명예와 권력과 마음을
들뜨게 하는 인기와 성공을 내려놓게 하고
마침내 자기 자신을 발견하게 한다.
'백합 > 주님의 향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프랑스에서 온 전보 (0) | 2020.08.12 |
---|---|
배씨 할아버지 (0) | 2020.08.11 |
물 위를 걷는 세 노인 (0) | 2020.08.09 |
준주성범 제2권 - 제5장 자신을 살핌 (0) | 2020.08.08 |
성경 독서를 할 때 (0) | 2020.08.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