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합/행복 가득한곳

그랬으면 좋겠네|◈─……

수성구 2019. 11. 22. 02:19

그랬으면 좋겠네|◈─……행복가득한곳

       

그랬으면 좋겠네     애인이 빨리 늙어 소처럼 느리고 순해지면 좋겠네 빨리 늙은 애인이 느지막이 일어나 찬 없는 밥을 우물우물 먹고 나서 "산수유 꽃 피었드만, 그거나 보러 가지", 그랬으면 좋겠네 "사람구경도 참 쏠쏠하구먼, "천천히 걷지 뭐, 그랬으면 좋겠네 강 언덕에 시름도 없이 앉아서는 "노을빛이 퍽 곱구먼, 그랬으면 좋겠네 주름진 내 손을 슬쩍 당기며 "거 참, 달빛 한번 은근하네", 그랬으면 좋겠네 애인이 빨리 늙어 꾀병 같은 몸사랑은 그만두고 마음사랑이나 한껏 했으면 좋겠네 산수유 그늘 아래 누워 서로의 흰 머리칼이나 뽑아주면 좋겠네 성근 머리칼에 풀꽃송이 두엇 꽂아놓고 킥킥거렸으면 좋겠네 빨리 늙은 애인이 허허 웃으며 주름진 이마나 긁적거리면 좋겠네 아직두 철부지 소녀 같다고 거짓농이나 던져주면 좋겠네 한세상 흐릿흐릿 늙어 가는 게 싫지는 않냐 물으면 "흥, "흥, 콧방귀나 뀌었으면 좋겠네 / 이시하 <나쁜 시집> (천년의 시작, 2010)    


너덜너덜   사랑하는 동안, 우리는 너덜너덜해졌다 서로를 물어뜯을 때마다 세상이 바뀌는 것도 아니었는데 우리는 지나치게 몰두했고 터무니없이 용감했다 아주 가끔, 위로의 소주잔을 건네며 밤늦도록 질기고 맛없는 문장들을 씹었으나 깨어나면 어제보다 불결한 구토가 입술을 더럽혔다 철학책 같은 시집들을 구겨 밑을 닦았다 꽃그림이 그려진 퍽 도덕적인 시집은 밑줄을 그어 가출한 소녀에게 선물했다 좀처럼 해독하기 힘든 몇몇의 시집들은 어학사전 옆에서 낡아갔다 길들여지지 않는 낯선 모국어들이 무럭무럭 썩어갔다 사랑하는 동안, 우리는 너덜너덜해졌다 다시는 장미를 꿈꿀 수 없게 서로의 흉터를 후벼 파고 덩굴식물을 심었다 우리는 기꺼이 상처입고 담담하게 앓아누웠다 아주 가끔, 어린 새처럼 즐거이 휘파람을 불었고 봄바람처럼 근심 없이 웃었으나, 깨어나면 어제보다 창백한 슬픔이 발밑에 흥건했다 / 이시하                 청춘이 청춘을 멀리하는 것은 몸 때문이다. 변덕이 죽 끓듯 하는 몸, 열기를 다스리지 못해 오르락 내리락하는 몸에 젊음은 버겁다. 빨리 늙고 싶은 것은 젊은 몸이 부담스럽기 때문은 아닐까. 나를 채워줘, 나를 안아줘, 징징거리는 몸속의 어린아이. 끊임없이 보채며 달그락거리는 몸속의 쥐새끼들! 그러나....그 달그락거림이 잦아드는 노년은 과연 해탈의 나이일 수 있을까. 그러나 그것은 청춘이 꿈꾸는 로망일 뿐 현실은 아닐 터이다. 삶은 관계다. 꼴랑 나만 성불할 수는 없는 일 아닌가. 그대들의 행복 없이는 나의 행복도 기대할 수 없다는 이야기다. 아내는 병들고, 자식 사업은 흐물흐물하고,, 관절이 아리고 쑤시고, 어깨가 천근만근이라면 평안은 물 건너간다. 수도자들은 그래서 독신을 의도적으로 선택하는지도 모른다. 관계 속에서 해탈은 너무도 버겁다. 몸을 가진 이상 해탈은 너무도 멀다. 그러나 몸을 버린다는 것은 세상을 버린다는 말이겠다. 몸의 끝이 세상의 끝이다. 황지우의 말대로 ‘몸 있을 때까지’ 삶이고 사랑이다 부디 사대육신 멀쩡히 간직하시자. 아프시더라도 너무 많이 아프시지는 말자. / cozb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