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합/사는 이야기

보고싶다 영순아..|―········

수성구 2013. 12. 17. 15:07

 




    보고싶다 영순아..

     

    40여 년의 긴 세월이 흘렀어도 아직도 뇌리에 생생히 남아

    있는 아주 슬픈 추억이 있다...

     

     

    내일 이 오빠는 이곳 월남에서 마지막 전투에 나가게 된다.

    한 일주일 정도 걸릴 것 같은데 돌아오면 바로 귀국을

    하게 된다. 이 오빠가 아마도 우리 영순이에게 이곳에서

    보내는 마지막 편지가 될것 같다.

     

    정말 부모님과 영순이가 보고싶다.

    어서가서 네 어여쁜 얼굴과 밝은 미소를 보고싶어.

    이 오빠는 요즘 밤 잠을 설친단다.

    정말 보고싶다.. 영순아 사랑한다..

     

    귀국하는대로 제대를 하고 바로 결혼을 해서 남은 여생을

    같이 보내고 싶구나.

    영순아... 너무도 우리 영순이가 보고싶다.

    다시 말날 때까지 안녕히..  영순아.. 사랑한다...

     

    매년 초여름이 시작되는 6월이 오면 나는 꼭 한번씩

    다녀오는 곳이 있다. 서울 동작동 국립 현충원이다.

     

    수많은 독립유공자와 나라를 위해 산화한 용감한 전쟁

    영웅들이 잠들어 있는 곳이다. 특별한 인척관계나

    친한 친구도 아닌 어떤이의 묘비를 찾아간다.

     

    손에 조그만 꽃 다발을 들고 한참을 걸어 월남전 참전

    용사들이 잠든 사병묘역 한 모퉁이에 발을 멈춰

    꽃다발을 놓고 한 동안 고개를 숙이고 먼저 간이의

    명복을 빈다. 벌써 이곳을 찾은 지도 어언 40년이

    넘어가도록.. 그간 무정한 세월이 많이도 흘러갔다.

     

    20대 건장한 체격의 나 자신도 이젠 세월 따라서 같이

    늙어가며 이젠 백발이 무성한 늙은이가 되었다.

    흘러가는 세월과 시냇물은 붙잡지 못한다더니 1970년 4월

    월남에서 전사, 육군 상병 박00.

    그 묘비를 쓰다듬으며 그와 대화를 나눈다.

     

    박상병 내가 또 왔다네 수 많은 세월이 흘렀어도 자네는

    여전히 이곳에 누워 있구먼 그려..

    박상병 정말 자네한테 미안하구먼 용서 하시게나.

     

    이곳에 올때마다 내가 중얼거리는 넋두리는 항상같다.

    박상병 자네가 그렇게 보고싶어하고 사랑하던 영순이를

    그곳 하늘나라에서 만나서 이곳에서 못 이룬 사랑의 한을

    풀었으리라 믿는다네.

    잘있게 박상병. 내년에 또 자네 만나러 오겠네.

     

    다시 한 번 하얀 묘비를 쓰다듬고 일어서 되돌아온다.

    천천히 걸어오다가 하늘을 올려다보니 먼 하늘에 떠있는

    하얀 뭉게구름 두 덩이가 내게 무슨 사연인가 속삭여 주는

    듯한 망상에 젖어 걷다보니 벌써 국립 현충원 입구

    주차장이다.

     

    결국 나 역시 멀지 않은 세월 후 국립 현충원에 가서

    박상병처럼 하얀 비석밑에 뭍혀 남겠지만 나는

    아직 살아있고 그는 그 먼 세월 전에 이곳에 잠들어 있다.

     

    ---------------

     

    이미 잊혀진 전쟁.

    베트남 전쟁에 나는 육군 병장을 달고 나녀왔다.

    그곳 동해안 나트랑 외곽에 있는 102 후송병원에 의무병

    으로 2년을 근무하다 귀국해서 제대를 했다.

     

    40여 년의 긴 세월이 흘렀어도 아직도 뇌리에 생생히 남아

    있는 아주 슬픈 추억이 있다.

     

    어느날 대 규모 작전지역에서 헬기 그물망 호이스트에 실려

    총상환자 여러명이 급히 실려왔다.

    들것을 붉게 물들인 가장 심한 어느 총상환자의 얼굴은

    심한 고통에 몹시일그러져 있었으며 응급실 당직 군의관과

    같이 매우 분주한 진료중에 그 환자를 맞았다.

     

    아마 그 총상 환자는 군의관의 진찰 결과 흉부 관통 총상에

    의한 다량 출혈로 이미 소생 불가능한 측은한 병사였으며

    군번 줄을 보니 박 상병 이었다.

     

    고통을 덜어주려 링거에 진통제를 주사해 주고 있는데

    갑자기 그가 벌떡 일어났다.

    핏기 없는 핼쑥한 얼굴로 눈을 부릅뜨더니 한 손으로 오른쪽

    윗주머니를 가르치고 나서 바로 고개를 떨구었다.

    그만 세상을 하직한 것이다.

     

    곧 군의관의 검안서를 받아서 영안실로 연락을 했다.

    영안실 사병들이 들것을 갖고 사체를 인수하러 와서 들고

    나가기 전에 나는 문득 그의 마지막이 생각나서 그의

    윗 주머니를 열어보았다.

    핏빛에 물든 편지봉투 하나가 접혀서 들어있었다.

     

    그리고 그속에 들어있는 머리를 양쪽으로 곱게 따내린

    여인 사진과 편지 내용은 곧 귀국해서 만나서 결혼을

    하자는 내용의 미쳐 못 보낸 편지 한 장이었다.

     

    나는 그 편지와 사진을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생각에

    비닐로 곱게싸서 내 관물함에 보관을 했다.

     

    몇 달 후에 임무를 끝내고 귀국을 한 후에 나는 그 편지의

    주소대로 강원도 삼척군 근덕면 궁촌이란 마을로

    박상병 집을 찾아갔다.

     

    당시만 해도 교통이 몹시 불편해서 그곳에 찾아가니 이미

    어두워져 있었다. 저녁 무렵에 박상병 집에 도착했더니

    늙으신 부모 두 분이 반겨주셨다.

     

    그날저녁 그 집에서 하루를 묵으면서 당시의 이야기를

    전해드렸다. 이미 전사통지와 유골을 국립묘지에 가서

    보고 오신 두 분은 나를 붙잡고 통곡하셨다.

     

    조금 있으니 같은 동네 사는 박 상병의 그 여인 영순씨가

    찾아왔다.  조금 떨어진 냇가로 같이 나가서 나는

    그 마지막 유품 비닐뭉치를 그녀에게 전해주었다.

     

    고개를 숙이고 그녀는 어깨를 들썩이며 소리없이 흐느껴

    울었다. 그리고 긴 시간을 그녀 영순씨로 부터 박 상병과의

    지난날 사연을 들을 수 있었다.

     

    겨우 40여 호가 모여사는 전형적인 농촌 마을에서 고인이

    되버린 박 상병과 그의 연인 영순씨가 태어나 아래 윗집에서

    다정한 오누이 처럼 그렇게 성장했고 겨우 두 살 차이지만

    사랑하는 연인이 되어갔으며 바로 지금 대화를 나누고 있는

    냇가에서 자주만나 장래를 약속하며 보내던 중 박 상병이

    군에 입대를 했다고 했다.

     

    그 후 박상병 소속 부대가 월남 파병부대로 선정되어 할 수

    없이 월남으로 가게 되었고 그간 수많은 사연들이 둘 사이에

    오고갔으며 한 달 후에 귀국을 하게 되면 양가 부모님도

    모두 허락한 사이기에 결혼을 하기로 약속을 했는데

    그만 갑작스런 박 상병의 전사 통지서를 받고 부모님은

    혼절을 하셨고 영순씨 역시 매일 냇가에 나와 한참을

    흐느껴 울곤 했다고 한다.

     

    반 년 정도 세월이 흘러 조금 잊혀질 즈음에 내가 피 묻은

    편지를 들고 나타난 것이 그만 슬픈 추억의 불씨를

    되살려 준듯했다.

     

    정말 고맙습니다. 일부러 이리도 먼 길을 찾아오시고

    오빠의 마지막 마음을 전해 주셔서요.

     

    아, 아닙니다 영순씨 같은 입장에서 그 박 상병의 마지막을

    지켜본 전우로서 그 애절한 마음을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그곳 생과 사의 전쟁터에서 수 많은

    전우들의 처절한 모습을 직접 지켜보며 2년여를 보내고

    돌아왔습니다.

     

    괜스래 제가 찾아와서 영순씨를 더욱 힘들게 하지 않았을까

    염려됩니다. 사람은 누구나 태어나서 살다가 결국은 흙으로

    되돌아갑니다.

    그 기간이 조금 길던가 아니면 짧은가 뿐입니다.

     

    영순씨. 박상병이 그리리워지면 가끔씩 서울 동작동 국립

    현충원을 찾아 그 곳에 누워있는 박상병을 만나고 오십시오.

    저도 가끔씩 몇몇 전우들을 만나러 그곳을 찾아가니까요.

     

    정말 다시 한 번 감사를 드립니다.

    내일 가실 때는 인사를 못 드릴것 같아요. 안녕히 가십시오.

     

    너무도 울어 퉁퉁부은 눈으로 영순씨가 고개를 숙여 하직

    인사를 했다. 한 두어 시간을 둘 사이의 사연을 듣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혜어져 박 상병 집으로 돌아오니 박 상병 부모님이

    나를 친 아들 대하듯이 박상병이 지내던 건너방에

    잠자리를 마련해 주셔서 편안히 그 날을 묵고 조반까지

    얻어먹고 하직 인사를 드리고 왔던 길을 되돌아 귀가를 했다.

     

    한달쯤 후에 나는 박 상병의 부모님으로부터 충격적인

    한통의 편지를 받았다. 내용은 며칠전에 박상병의 그 여인

    영순씨가 그만 동네 뒷산에서 목을매어 자살을 하고

    말았다고 했다.

     

    나중에 살펴보니 가슴 속에 바로 내가 전해준 피 묻은

    박상병의 편지가 들어있었다고 했다.

     

    많은 세월이 흐른 후에도 가끔 그곳 동해바다 삼척부근으로

    여행을 가게되면 그 때 일이 새삼 떠올라서 그곳 부근에

    차를 세우고 한참을 서서 그 슬픈추억을 떠올리곤 한다.

     

    괜스레 급한 내 성격탓에 신중치 못하고 그 피 묻은 편지를

    들고 먼길을 찾아가 그의 연인 영순씨에게 전해주어

    또 다른 귀한 생명을 잃게 만든 죄 책감에 많은 세월이

    흘렀어도 깊은 후회속에 살아간다.

     

    박 상병과 그를 진정 사랑했던 영순씨의 명복을 빈다.

    속죄의 뜻으로 나는 앞으로도 계속 박 상병을 찾을 것이다.

    정말로 가슴아픈 슬픈 추억이다.

     

                                ~ 옮겨온 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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