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합/묵상글 나눔

묵상기도와 관상기도에 대하여

수성구 2014. 9. 25. 05:51
묵상기도와 관상기도에 대하여

 

 

1. 묵상기도와 관상기도에 대하여

 

아직 기도의 기(祈)자도 잘 모르는 사람이 묵상기도와 관상기도에 대하여 이야기한다는 것이 몹시도 부끄러운 일이기도 하지만 그래도 용기를 내어 글을 쓴다는 자체도 정말 한심스러울 만큼 부끄럽니다. 하지만 다시 한 번 용기를 내어 글을 씁니다. 우리 가톨릭엔 가장 거룩한 제사인 미사성제와 성체강복, 성체조배, 십자가의 길 등 많은 기도가 있고 일곱 가지 성사가 있으며 그 외에 가톨릭신자들이 가장 많이 올리는 기도가 있다면 묵주기도일 것입니다. 묵주기도는 예수님의 생애와 수난과 영광을 묵상하는 아주 아름답고 좋은 기도입니다. 저는 오랫동안 묵주기도를 해 왔습니다. 그런데 아주 오래전 이야기입니다. 저는 묵주기도를 하다가 지독한 분심 때문에 기도를 중단한 적이 있습니다. 그 지독한 분심은 정말 사람을 미치게 할 정도였습니다. 자꾸만 분심을 쫓아내려고 한 그때의 일을 생각하면 바보 같기도 합니다. 왜 기도를 중단했는지 지금 생각하면 우습지만 암튼 그때는 너무 지독한 분심 때문에 오랫동안 기도를 중단하고 세상적으로만 살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왜 그때 저는 기도를 중단했을까요? 그것은 아무도 나를 도와주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도와준다는 것은 영성적인 일을 말합니다. 기도의 길은 누가 도와주지 않으면 초보가 지나고 조금 깊은 묵상에 가면 분심 때문에 흔들리기 마련입니다. 악마는 한 영혼이라도 기도하지 못하게 언제나 방해하니까요?

한국의 수도원에는 다음과 같은 조크가 있습니다.

 

어떤 성인이 수도원을 갔더니 마귀란 놈이 땀을 뻘뻘 흘리면서 뛰어다니더래요. 그래서 그 성인이 마귀란 놈에게 물었답니다.

“너, 왜 그렇게 뛰어 다니느냐?”

“예, 이렇게 뛰어다녀도 한 건 할까 말까해요. 여기 영혼들은

기도로 무장이 잘 되어 있거든요.“

그 성인이 다시 어느 사창가 옆을 지나는데 마귀란 놈이 길가에 자리를 펴고 누워서 쿨쿨 낮잠을 자고 있더래요. 마귀를 깨워서 물었답니다.

“너, 여기서는 왜 낮잠만 자느냐?”

“참내, 여긴 낮잠을 자도 제 밥인 걸요. 모두 저절로 굴러들어오잖아요.”

 

재미있는 조크입니다.

각설하고 이제 다시 기도에 대해서 나누기로 하지요. 묵상기도는 대개 추리묵상을 하게 됩니다. 예를 들면 ‘환희의 신비 1단 마리아 예수님을 잉태하심을 묵상합시다.’ 라고 하고 주의 기도와 성모송을 외우면서 상상으로 2천 년 전으로 돌아가서 처녀 마리아가 가브리엘 천사를 만나고 성경에 있는 말씀을 주고 받는 상황설정을 하고 묵상를 하게 됩니다.

또 다른 예를 들어볼까요?

하느님이 하늘의 옥좌에 계시고 천사들이 좌정하고 모든 성인성녀들이하느님을 흠숭하는 장면을 설정하고 묵상기도를 한다고 합시다. 이렇게 하는 묵상을 추리묵상이라고 합니다. 모든 기도를 이런 추리로 어떤 상황설정을 하면서 묵상을 하게 되는 것이지요. 이런 묵상기도를 오래하다 보면 어떤 상태가 오게 됩니다. 언제나 분심이 들지만 그래도 기도는 끊임 없이 하여야 합니다. 그 상태가 어떤 상태인가 하면, 지금까지는 생각지도 못한 분심이 자꾸만 들고, 메마르고 도무지 기도의 맛이 없고, 자꾸만 기도가 하기 싫어집니다. 심지어 이런 분심이 들 바에는 차라리 기도를 접는 게 낫다고 생각하고 기도를 중단하게 됩니다. 여기서 저 유명한 십자가의 요한 성인의 말씀을 잠시 인용하고 넘어 갑니다.

 

“영성생활에서 한 영혼이 앞으로 나아가야 할 때에 스스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또 알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이를 찾지 못한다는 것은 지독하게 고통스러운 일이다.“

- 가르멜의 산길 p15. 십자가의 요한 지음. 방효익 옮김. 기쁜소식 -

 

많은 사람들은 이야기합니다. ‘가톨릭은 조용하고 좋은데 너무 냉정한 것 같다고.... 아무도 이끌어주지 않는다고...’ 맞는 말씀입니다. 예비신자는 물론이고 영세를 받은 신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성직자나 수도자들은 자신들의 기도나 맡은 소임도 많지만 신자들은 많고, 신자들의 영혼상태를 일일이 점검할 수가 없습니다. 또한 신자들마다 모두 영성이 조금씩 다를 수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구송기도를 좋아하나 하면, 어떤 분은 묵상기도를 좋아하기도 합니다. 어떤 분은 기도가 봉사보다 더 좋아서 기도를 더 많이 하는 사람이 있나하면 어떤 분은 봉사활동이 좋아서 기도도 하지만 봉사 쪽에 더 많은 신경을 쓰고 신앙생활을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야말로 성경에 나오는 마리와와 마르타의 영성이지요. 그래서 성직자나 수도자분들이 신자 모두의 신앙을 이끌어 줄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그렇다고 대부나 대모님이 이끌어주는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의 대부모들이 그렇지 못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지금 말씀드리는 것은 일반적인 신앙에 대한 것들입니다만 다시 묵상기도 이야기로 돌아갑니다. 물론 십자가의 요한 성인이나 아빌라의 데레사 성녀 같은 위대한 성인성녀께서 하신 말씀들이 있습니다. 즉 ‘능동적인 묵상’인 것입니다. 제가 ‘능동적인 묵상’이라고 했나요? 잘 보아 두십시오. 여기서 다시 가르멜의 산길을 번역하신 수원가톨릭대학교 방효익 신부님의 말씀을 잠시 인용합니다.

 

“가르멜의 산길 저자(십자가의 요한 성인)는 자신의 경험들이 오류일 수 있고, 사람을 속일 수도 있기 때문에 여기에 전적으로 매달릴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도우심을 청하면서 오류에 빠지지 않게 성령의 말씀인 성경에 의존한다고 한다. -중략- 교회의 체험과 일치하고, ‘교회의 판단에 맡겨진 체험’에 대한 입장을 분명히 밝히는 것이다. 저자(십자가의 요한)는 기쁨과 고통, 희망과 번뇌가 교차하는 가운데 살아가는 많은 영혼들이 이 글을 읽고 사적계시에 대한 허황된 이론들의 유혹과 그에 따르는 자연적이며 초자연적인 현상들로 말미암아 잘못된 영성생활로 들어서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하느님께로 나아가기에...”

 

- 가르멜의 산길. 방효익 신부님의 서론 중에서 -

 

이야기가 잠시 빗나가지만 기도할 때 어떤 느낌이나 사적계시에 집착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절대로 그런 것에 신경쓰지 마시고, 기도에만 전념하라는 이야기입니다. 심지어는 촛불만 조금 이상헤도 무슨 계시인가?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절대로 그런 것에 신경쓰지 마시고 기도에만 오직 기도에만 전념해야 합니다. 다시 묵상이야기를 합니다.   

이런 추리묵상을 마음을 다하고 정성을 다해서 오래하다 보면, 정말 지겨울 정도로 기도가 싫어진다는 것입니다. 해야 하긴 하는데 분심이나 그 밖의 메마름이나 아무튼 하느님이 싫지는 않은데 버림받아지는 느낌이거나 그 밖에 사람에 따라 다르지만... 암튼 기도의 위기가 오기 마련입니다. 이런 때는 어떤 영적인 도움이 필요한데, 현대사회는 모두 바쁘고 사람은 많고, 아무도 나를 도와줄 사람은 없습니다. 부족한 저의 경우를 잠시 언급합니다. 저도 오랫동안 기도를 놓고 죄만 짓고 있었지요. 마음은 언제나 ‘기도를 해야 하는데...’ 하면서도 묵상기도를 하거나 묵주기도를 하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기만 하면(긴 시간입니다.) 어김없이 이상한 분심이 수 없이 밀려와서 또 다시 기도를 놓게 되고, 또다시 하게 되는 것을 오랫동안 반복하게 되었습니다. 이 와중에서 저는 누구의 도움을 받을 줄도 몰랐고, 설령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는 성직자와 수도자가 있다고 해도(친분이 있는 성직자와 수도자는 많았습니다.) 깊은 기도의 방법을 이야기하기엔 여러 가지 여건상 좀 어려웠습니다. 그런 와중에 좋으신 하느님께서는 죄 많은 사람을 다시 기도하게 해 주셨지요. 그 부르심은 실로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어떤 성직자나 수도자를 보내주신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 어떤 성직자나 수도자보다도 더 많은 도움을 준 것이 성경과 함께 영적독서였습니다. 성경은 이미 오래전부터 공부왔었지만, 어느 해 내적인 심한 갈증으로 무작정 명동 바오로 딸 서점을 찾았습니다. 특히 묵상이나 관상기도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그 분야에 관한 성인들의 책을 고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오래전 가장 먼저 읽은 책이 ‘무지의 구름’이었습니다. 이 책은 여러 번 읽은 기억이 납니다. 예전 초판본을 다 보고 책에 연필을 하도 그어서 재판본을 다시 사서 읽기를 반복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리고 아빌라의 데레사 성녀의 ‘영혼의 성’ ‘완덕의 길’ ‘천주자비의 길’ 십자가의 요한 성인의 ‘어둔밤’ ‘가르멜의 산길’ ‘영가’ 등, 두 성인 성녀가 쓰신 책의 번역본은 거의 모두 사서 읽을 정도로 영혼은 심한 영적갈증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기도를 시작하였습니다. 참 감사한 것은 기도생활을 하면서 그런 영적독서를 하게 되면, 읽는 글 한자, 한 줄이 아깝고 놓치기 싫고 귀하게 여겨지게 되었습니다. 예전엔 그렇게 딱딱하고 재미없던 책들이 이젠 꿀같이 달고, 세상에는 없는 향기가 나게 되더라구요. 그리고 어디를 가든 누구를 만나던 하느님의 사랑과 하느님의 구원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고, 그분을 섬기는 이야기는 어디서나 하고 싶은 마음이 솟구쳐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신자들을 만나면 이야기를 잘 들어주기도 하지만 저는 늘 하느님의 이야기로 자연스럽게 화제를 바꾸곤 하였고, 그때 마다 이야기를 나눈 사람들은 모두 긍정적이었으며 그시절에 저와 이야기하던 분들은 지금 현재 거의가 기도의 길을 가고 있습니다. 놀랍게도 위의 책들에서는 왜 그런 분심이 일어나는지? 내 영혼의 상태는 어떤지를 시원스럽게 밝혀주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깨닫는 데는 많은 기도와 함께 여러번 반복하여 읽게되었습니다.

사실 저는 가톨릭에서 하는 교육중에 가장 엘리트 교육이라고 하는 꾸르실료 교육, 부부주말 피정인 ME주말코스, 그리고 여러 가지 피정, 지구 성령세미나 등과 본당내의 사목위원, 레지오 활동, 지구 성령세미나강사 등을 나름대로 열심히 하였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신심단체인 레지오활동을 제외하고는 그런 피정이나 교육, 사목활동이 신앙생활에서 도움이 되기는 했지만 기도생활을 진전시키고 온전히 하느님께 이끌어 주지는 못했던 것은 사실이었음을 고백합니다. 기도란 온전히 하느님과 나와의 관계이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암튼 제겐 그랬습니다.

저는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들이 묵상을 하기 아주 좋은 기도는 가장 보편적이고 아름다운 기도인 묵주기도가 최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묵주기도를 하면서 받은 은총이 얼마나 많은지, 그것은 받은 저만 아는 기도의 비밀이기도 합니다. 환희, 고통, 영광의 신비와 빛의 신비!

 

태중신자인 저는 아주 어렸을 때 묵주기도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 땐 지루하기만 하기에 묵주기도를 그만 두었고, 청소년기에 다시 묵주기도를 하였지만 역시 오래가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성당 청년회활동은 열심히하였던 것 같습니다. 그래도 기도는 고작 저녁기도가 고작이었지만 거룩한 미사는 꼭 봉헌하였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청소년기가 가고 군에 입대하였을 때는 떨어지지 않는 실묵주를 목에 걸고 가서 혼련을 받을 때 자면서도 묵주기도를 한 기억이 납니다. 그리곤 묵주기도흫 한 기억이 없습니다. 다시 묵주를 든 것은 결혼 후 한참이 지난 때 였습니다.

 

그때  저는 이 기도들을 처음으로 추리묵상으로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환희, 고통, 영광의 신비를 새벽에 일어나서 15단을 하는데 처음에는 한 시간 정도 걸렸습니다. 지금은 45분 정도 걸립니다. 그야말로 능동적인 기도지요.(능동적인 기도라는 말을 잘 보아두십시오.) 그리고 잠자기 전에 빛의 신비를 합니다. 대개 천천히 하면 묵주기도 5단은 15분 정도 걸리더라구요. 지금부터 거술러 올라가면 묵주기도는 오래전에 다시 시작했는데 어느 정도의 세월이 흐르면 또 다시 어김없이 온갖 분심과 잡념이 기도를 방해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굽히지 않았습니다. 저는 작은 기도실이 따로 있습니다. 기도실에서 손으로 분심을 밀어내는 시늉까지 하면서 온전히 하느님께 매달리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기를 몇 년, 사실 이렇게 기도했던 시기는 개인적으로 여러 가지 견디기 힘든 심적인 고통으로 시달리고 있었던 때 였습니다. 그래도 절대로 묵주를 놓지 않았습니다. 그런 분심과 싸우며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또 몇 년이 흐른 어느 날부터는 이젠 그런 분심은 거의 줄어들긴 했지만 또 다른 벽이 나를 막고 서 있었습니다. 그것은 기도 자체가 싫어졌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 때 역시 추리묵상을 하면서 기도할 때 였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말입니다. 이 때 부터 묵상이 잘 되지 않았습니다. 도무지 제가 늘 하던 추리가 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사람이 멍해지고 있었습니다. 기도를 하면 멍하니 아무 생각도 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추리를 하려고 애를 쓰면 쓸수록 기도가 잘 되지 않고 어쩌다 추리묵상에 들어간다고 해도 예전 같지가 않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내면이 약간 소란스러울 정도의 분심도 들었습니다. 물론 예전처럼 그런 무지막지한 분심은 없어졌지만요. 왜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지 저는 몰랐습니다. 알리도 없구요. 이 시기에 저는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와 십자가의 성요한 성인의 책들을 읽으면서 보냈습니다. 두 분 성인성녀의 책들을 읽으면서 비로서 깨달았습니다. 이런 내적인 위기는 왜 오는지? 그리고 왜 그런 기도의 위기가 있어야 하는지 비로소 알았습니다.(좋으신 하느님의 영원히 찬미와 감사와 흠숭과 영광받으소서.)

눈물이 났습니다. 가족들이 있으니까 펑펑 울지는 못하고 기도실에서 속으로 한 없이 울었습니다. 그리고는 고요히 아빌라의 데레사 성녀가 가르쳐준 대로 내 안에 계신 예수님을 바라보기 시작했습니다. 아무 생각 없이 그냥 가슴에 있는 내 주님을 바라보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처음엔 잘 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또 몇 년이 흘렀습니다. 저는 저의 기도가 더 구체적인 진전을 바랐습니다. 그런데 또 더 이상 진전하지도 않고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때는 방효익신부님의 가르멜의 산길을 읽을 때였습니다. 아아, 주님, 여기에 있었네요. 이게 저의 대답이었고 이곳에서의 제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자랑할 것도 자랑할 일도 없는 것을 구차하게 길게 써봐야 도움도 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저는 성직자도 수도자도 아닌 그냥 교회에 순명하면서 신앙생활을 하는 신자일 뿐입니다. 그런 신자에게 무슨 특별한 일이나 자랑할 것이 있겠습니까? 저도 사도바오로 처럼 자랑할 일이 있다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밖에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2코린토 10, 17 자랑하려는 자는 주님 안에서 자랑해야 합니다.)

모두 각자의 내면에서 활동하시는 하느님께 모두를 맡겨 드리는 일이 가장 중요한 것 같습니다.

 

-  사랑의 향기마을 저의 칼럼 게시판에 가시면 묵상기도와 관상기도 2편과

3편이 올라와 있습니다. -

 

2014년 9월24일

연중 제25주간 수요일

김진학 안드레아 였습니다.

 

 

 


            사진은 제 골방 기도실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