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합/오늘의 강론

영혼을 잊어버린 시대의 사람들

수성구 2022. 9. 17. 05:10

영혼을 잊어버린 시대의 사람들

 

1코린 15,35-49; 루카 8,4-15 / 연중 제24주간 토요일; 2022.9.17.; 이기우 신부

 

  부활의 현실은 영혼 즉, 영적인 몸의 생명 활동입니다. 사실, 영혼 없이 태어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영혼을 잊어버린 채 육신의 본능이나 마음의 욕구대로 살아가는 사람은 대단히 많습니다. 오늘날 이 시대를 영혼을 잊어버린 시대로 부를 수도 있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세상 전체를 차지한다 하더라도 제 영혼을 빼앗기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는 경고를 우리는 듣고 있습니다. 

 

  우리가 세례성사를 받는 이유는 잊어버리고 살던 영혼에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은총으로 생기를 불어 넣기 위해서입니다. 생기를 부여받으면 영적인 몸이 살아나는데, 이 영적인 몸이 영혼으로서 하느님과 통교를 하고 천상의 성인들과도  통공을 이룰 수 있게 되는 부활의 현실이 가능해집니다. 기도는 우리네 영혼이 깨어나는 기본적인 생명활동이며, 애덕의 실천은 영혼을 성장시키는 필수적인 생명활동입니다. 영적인 통공을 통해서 지상의 우리가 천상의 성인들과 통교하면서 영적 에너지를 충전받을 수 있습니다. 영혼이 깨어있는 이들 사이에서는 지상에서도 수평적 통공이 가능한데 이를 연대라고 말합니다. 기도하지 않고 애덕을 실천하지도 않으면 통공과 연대의 능력이 발휘될 수 없습니다. 영적인 몸의 발육부진 상태가 심해지면 공감능력과 신앙감각을 상실하게 됩니다. 자기밖에 모르는 괴물형 인간, 공감능력을 상실한 싸이코패스가 출현하는 배경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사도 바오로가 풀이한 ‘씨앗과 열매의 비유’는 부활의 신비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부활 신앙임을 깨닫게 해 주는 명쾌한 설명입니다. 영적인 몸의 현실에 관하여 믿음이 없는 이들에게 알기 쉽기 설명하기가 그리 쉽지 않습니다. 이는 이성의 영역이 아니라 체험의 영역이기 때문입니다. 바오로는 씨앗이 땅에 떨어져 묻혔다가 썩어 없어질 것 같아도 새로운 싹으로 다시 살아나고 끝내 더 많은 열매로 맺는 자연의 이치를 동원해서 알기 쉬운 비유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물질적인 몸으로 묻히지만 영적인 몸으로 되살아난다는 것입니다. 바오로는 예수님을 알고, 부활을 깨우친 그 순간부터 세상에 대해서 죽었다고 여겼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다시 태어났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부활을 살아가는 차원은 이미 이 현세에서도 가능한 것이고, 그것이 영적인 몸의 현실인 것이지요. 

 

  또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는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영혼을 일깨우시기 위해서 하느님 말씀을 선포하시는데, 부활 신앙을 목표로 구분해 볼 때 사람들 사이에서 나타나는 네 가지 반응을 보여줍니다.

이 비유를 말씀하신 때는 공생활 초기가 아니라 말기였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아마도 예수님께서 수도 없이 많은 기회에 역시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에게 하느님과 그분의 나라에 대하여 말씀을 하셨을 테지만, 듣자마자 잊어버리고 자기가 먹고 사는 일에 몰두하는 사람들이 제일 많았을 것입니다. 길바닥에 떨어진 씨앗의 운명처럼 말입니다. 

 

  개중에는 말씀을 듣고 머리로 이해한 이들도 생겨났을 테지만, 머리로 이해한 바를 실천을 해야 체험도 생기고 체험 중에서 깨닫는 바도 생겨날 텐데 머리로만 그치면 체험도 깨달음도 생겨날 틈이 없습니다. 바위 위에 떨어진 씨앗의 운명이 그렇습니다. 씨앗 속에 들어있는 양분만으로 연명하다가 뿌리를 내리지 못하는 단단한 바위에 가로막혀 해가 뜨면 곧바로 말라버리지요. 기복신앙의 슬픈 현실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에는 관심도 없이 오로지 자신이 지금 당장 필요한 복만을 청하는 딱한 종교인들이 부지기수로 넘쳐납니다. 

 

  이보다 더 적은 수의 신자들에게는 이중의 목표 추구라는 모순된 모습이 발견됩니다. 신앙으로도 성장하고 싶으나 세속에서도 놓치고 싶지 않은 달콤한 과실이 유혹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서로 충돌할 수밖에 없는 이중의 노력은 불필요한 갈등에 부대껴서 자기가 자기 자신을 무너뜨립니다. 많은 냉담자들이 가시덤불 속에 떨어진 씨앗의 운명을 오늘도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결국 남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스스로 숨을 막아 버려서 죽고 맙니다. 

예수님께서 보시기에 안타까웠던 현실은 좋은 땅에 떨어진 씨앗이 얼마 되지 않았다는 것이었습니다. 성전을 장악한 사두가이들도, 율법 해석을 독점한 바리사이들도, 무력 혁명을 불사하려던 젤로데들도, 이들 사이에서 우왕좌왕하던 군중도 그토록 가까이서, 직접 그분의 말씀을 듣고 그분을 뵈옵고 그분의 기적을 목격하고서도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고 떠나가 버렸습니다. 

오직 소수의 아나빔들만이 그분을 알아 뵈옵고 맞이하였으며 자신에게 주어진 영적인 몸을 소중히 가꾸었다가 사도직을 시작했으며 이로써 교회를 이룩함으로써 후대의 사람들도 그분을 믿을 수 있도록 배려를 했습니다. 그래서 먼저 믿은 이들이 시작한 사도직은 소중한 것이고, 그래서 이룩된 교회는 더 소중합니다. 왜냐하면 이들이 마치 좋은 땅에 떨어진 씨앗이 많은 열매를 백 배 이상 풍성하게 맺는 것처럼, 영적인 몸의 재생산을 그 이상으로 해 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