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방이 있다
/ 차동엽 신부
현대의학으로도 치유하기 어려운 병증(病症)가운데 하나로
무력증이 있다.
이것이 의욕상시,우울증을 수반하게 되면
치유책이 궁해진다.
육체적 무력증 못지 않게 신자를 괴롭히는 것이
영적 무력증이다.
오늘날 적지 않은 교우들이 시달림 속에서 호소하고 있다.
사랑하고 싶으나 사랑할 힘이 없습니다.
용서하고 싶으나 바늘 틈 만큼의 여유가 없습니다.
원수를 위해 기도하고 싶으나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습니다.
평안하고 싶으나 하릴없이 안절부절 못합니다.
행복하고 싶으나 까닭이 잡히지 않습니다
사목을 하고 싶으나 열정이 생기지 않습니다.
유혹을 물리치고 싶으나 나약하기 짝이 없습니다.
믿고 싶으나 도무지 믿어지지 않습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복음을 잏었기 때문이다.
많은 이들이 복음을 더 이상
복음으로 만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본래 복음은 말뜻 그대로 福音,Good News,기쁜 소식이었다.
하지만 2000년이라는 장구한 세월은
'은총'을 무거운 '의무'로 둔갑시켜 버렸고,
'복음'을 다시 업보(業報,karma)의 비정한 '도덕'으로
퇴행시키고 말았다.
그래서 주일마다 성당을 나오는 얼굴들이
무겁고, 무표정하고, 지쳐있고, 무기력한 모습들이다.
새해부터는 교우님들의 얼굴이 밝아졌으면 한다.
환희로, 행복으로, 평화로
환하게 빛나는 얼굴들이 되었으면 한다.
이는 무모한 꿈이 아니다.
가당치 않은 욕심이 아니다.
다시 복음을 만나면 된다.
기쁜 소식을 만나, 다시 가슴이 흥분되고
새 출발의 의욕이 솟게 되면,
일단 위대한 변화를 위한 첫걸음은 시작되는 것이다.
교우님들을
새로운 시작에로 초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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