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기생 황진이의 點一二口 牛頭不出(점일이구 우두불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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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종, 명종 때 최고 기생인 황진이에 관하여 전해오는
야화(野話) 중에서 "點一二口 牛頭不出"이란 이야기가
재미있어 '옮겨서' 올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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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성종시대 개성에 가무 절색 기생이 살았다.
예전의 기생이 명기가 되려면 미색 뿐 아니라,
글과 가무에 아주 능해야 했는데 이 기생이 그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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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의 소문은 싸이의 강남스타일이나
잰틀맨보다 더 급속히 파급되어
팔도의 많은 한량이 모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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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생을 찾아가서 연정을 고백했으나
그때마다 이 기생은 한량의 청을 들어주는 대신
문제를 내고 그 문제를 푸는 조건을 내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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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희대의 문장가라는 사람도
기생이 낸 글을 풀이하지 못하고 허탈하게 돌아 갔다.
기생은 자신을 사모하는 한량이나 선비를
모두 이렇게 거절하고
언젠가 자신의 글을 풀고 사랑을 나눌 님을 기다리며
평생 기생으로 가무와 글을 익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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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핏 한량이라하면 건달쯤으로 알기 쉽지만
예전엔 한량이라하면
사서삼경은 기본이고
글체가 좋고, 속심이 넓으며
기백이 뛰어나고, 인물 또한 출중하고
무엇보다 풍류를 알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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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지만 내노라하는 한량들 어느 누구도
기생의 앞에서 문장과 지혜를 능가할
기량을 가진 한량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남루한 중년의 선비가 기생집에 들었다.
기생집 하인들은 남루한 그를 쫒아 내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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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란을 목격한 기생은 선비가 비록 남루했지만
범상치 않은 기품이란 것을 알고
대청에 모시고 큰 주안상을 봐 올린 후
그 선비에게 새 집필묵을 갈아 이렇게 써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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點一二口 牛頭不出(점일이구 우두불출)
선비는 기생의 글귀를 보고 빙긋이 웃었다.
기생의 명주 속치마를 펼치게 한 후 단필로 이렇게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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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許"
순간 기생은 그 선비에게 일어나 큰 절을 삼배 올렸다.
절 삼배는 산자에겐 한번, 죽은 자에겐 두번
세번은 첫 정절을 바치는 남자에게 하는 여인의 법도이자
신하가 임금에게 하는 하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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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 선비와 기생은 만리 장성을 쌓았다.
그리고 보름이 지난 후 선비는 기생에게 문창호지에
시 한 수를 적어놓고 홀연히 길을 떠나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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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은 고이면 강이 되지 못하고
바람이 불지 않으면 꽃은 피지 아니한다.
내가 가는 곳이 집이요, 하늘은 이불이며,
목마르면 이슬 마시고, 배 고프면 초목근피가 있는데
이 보다 더 좋은 세상이 어디 있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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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기생은 그를 잊지 못하고
뼈에 사무치도록 그리워하며
비단가죽 신발을 만들며 세월을 보냈다.
풍운아인 선비의 발을 편안하게 해주고 싶은 애틋한 사랑에
손마디가 부풀도록 가죽 신발을 손수 다 지은 기생은
마침내 가산을 정리하고 그 선비를 찾아 팔도를 헤매 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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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처없이 팔도를 떠돌며 선비의 행방을 물색하던 중
어느 날 선비가 절에 머물고 있다는 풍문을 듣고
찾아가 극적으로 재회했다.
기생은 선비와 꿈같은 재회의 하룻밤을 보내고
다시는 선비를 놓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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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같은 재회의 첫 밤을 보낸 다음 날
해가 중천에 올라도 움직일 기색이 없는 선비에게
기생이 물었다.
낭군님 해가 중천인데 왜 기침하시지 않으시온지요?
그러자 선비는 두 눈을 감은 체
이 절간엔 인심이 야박한 중놈들만 살아
오장이 뒤틀려 그런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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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은 선비의 말을 즉시 알아 들었다.
급히 마을로 단걸음에 내려가
거나한 술상을 봐 절간으로 부리나케 돌아왔는데
하룻밤 정포를 풀었던 선비의 방앞 툇마루엔
선비 대신 지난 밤 고이 바쳤던
비단 가죽신만 가지련히 놓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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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년을 찾아 해맨 끝에 재회한 선비가
홀연히 떠나버린 것을 알고 기생은 망연자실했지만
이내 선비의 고고한 심증을 깨달았다.
선비의 사랑은 소유해도
선비의 몸은 소유할 수 없다는 것을 깨우친 기생은
선비의 깊고 높은 큰 사랑을 받았다는 것으로
스스로 위로하며 평생을 선비를 그리워하며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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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생이 유명한 평양기생 황진이다.
황진이는 평양기생으로 잘못 알고 있는데
사실은 개성기생이고 개성여인들은 미색이 뛰어나고
재주가 특출했다고 한다.
황진이가 그토록 사랑한 남자는
저서 화담집의 조선 성종 때 철학자 서경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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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진이를 만났을 때 서경덕이 푼 황진이의 글 뜻은
點一二口는 글자대로,
點一二口 이고 글자를 모두 합치면
말씀 (言) 자가 되고
牛頭不出 이란 소머리에 뿔이 없다는 뜻으로
牛에서 머리를 떼어 버리면 (午) 자가 되는 것이다.
이 두 글자를 합치면 허락할 허(許)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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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황진이는 서경덕에게 자신을 바친다는 뜻을
이렇게 사행시로 전한 것이다.
이 글자를 해역할 수 있는 능력이라면 자신을
송두리 바쳐도 아깝지 않다고 생각한 황진이의 기발한
사랑찾기가 정말 절묘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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