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합/고전글·한시

밀레의 '만종(晩鐘)'에 얽힌 슬픈 이야기

수성구 2020. 9. 10. 03:33

밀레의 '만종(晩鐘)'에 얽힌 슬픈 이야기

 

 

 

 

 

밀레의 '만종'은

우리에게 잘 알려진 그림입니다.

그 그림이 밀레의 대표작이라서가 아니라,
초등시절부터 미술 교과서에서 익히 보아 왔던
그림의 원본을 직접 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루브르 박물관에 있었던 다른 나라 관람객들도
'모나리자'와 '만종' 앞에 유난히 많이 몰려있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 때 이 그림 속에
아주 슬픈 사연이 숨어 있었다는 것은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이 그림에 숨어있는 슬픈 이야기는
귀동냥으로 알고 있었는데 최근에 한 아는 분이

 

바르비종 마을 사진과 사연을 보내왔어요.

그래서 글과 사진을 정리하고
다시 편집해 보았습니다.

혹시 앞으로 밀레의 '만종'을 보시게 되면
이러한 숨은 이야기를 생각하면서
그 그림을 감상해 보시면 좋겠다 싶어서요.

똑같이 그림을 보거나 음악을 들어도
그 배경과 숨은 이야기를 알고서 감상하는 것과
모르고 감상하는 것과는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을..

또한 '아는 것만큼 보이고,
아는 것만큼 즐길 수 있다.'는 말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프랑스 화가하면 떠오른 사람은 밀레이고,
밀레하면 만종, 이삭줍기, 씨뿌리는 사람 등
명작들이 바르비종( Barbizon) 마을에서 그려졌다고 합니다.

 

 

 


루브르에 돌아오기 전 '만종'은 미국 아메리카 미술협회에 팔렸다.

프랑스 측은 국회와 행정부는 물론 모금활동까지 벌여가며
'만종'이 미국에 팔리는 것을 막으려 했다.
그러나 부자나라 미국을 당할 수는 없었다.

프랑스가 자존심이 상한 채 주저앉아 있을 무렵
백화점 재벌 알프레드 쇼사르가 미국에 엄청난 대가를 지불하고

' 만종' 을 다시 사들인 것이다.

쇼사르는 이 그림을

개인 자격으로 소유하지 않고 루브르에 기증했다.
예술의 가치를 알아본 쇼사르가 없었다면
"만종"은 지금쯤 미국 어느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을 작품이다.

​이 그림은 '이삭줍기'와 더불어 많이 알려진 그림 중 하나다.
그림을 보면 하루 일을 마치고 농부 부부가
교회 종소리를 들으며 기도하는 평화로운 그림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이 그림에는 슬픈 이야기가 숨어 있다.
농부 부부가 바구니를 밭밑에 놓고 기도하고 있는데
사람들은 그 바구니가 감자씨와
밭일 도구를 담은 바구니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사실은 그 바구니에는
씨감자가 들어있던 게 아니라
그들의 사랑하는 아기의 시체가 들어 있었다.

그 시대, 배고픔을 참고 씨감자를 심으며

겨울을 지내면서 봄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아기는 배고픔을 참지 못해 죽은 것이다.
죽은 아기를 위해 마지막으로 부부가
기도하는 모습을 그린 그림이 바로 '만종'이다.

그런데 왜 그림 속의 아기가 사라졌을까?
이 그림을 보게 된 밀레의 친구가 큰 충격과 우려를 보이며
아기를 넣지 말자고 부탁을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밀레는 고심 끝에 아기 대신
감자를 넣어 그려 출품했다고 한다.

그 이후 이 사실이 알려지지 않은 채
그저 농촌의 평화로움을 담고 있는 그림으로 유명해졌다.

'살바도르 달리(Salvador Dali 1904-1989)' 정말 남달랐다.
밀레의 '만종'을 보면 누구라도
신성한 노동후의 고요한 정적과 평화를 느낄 것이다.

그러나 이 그림을 보고
'달리'는 알 수 없는 불안감을 맛보았다.
그 불안감이 얼마나 집요하게 그의 뇌리에 달라붙었는지
' 달리'는 오랫동안 그 까닭을 알아내려 했고,
그에 관한 책을 쓰기까지 했다.

​' 달리'의 직관은 밀레의 <만종>에 그려진

감자 자루를 어린 아이의 관으로 보고

이루 말할 수 없는 불안을 느꼈던 것이다.

 

1845~1852 년 사이

감자 마름병으로 인한 아일랜드 대기근


수십 년 후,
이러한 '달리'의 투시력은 환각이 아니라
실제로 정확한 관찰이었음이 밝혀졌다

루브르 미술관이 자외선 투사작업을 통해
그 감자 자루가 초벌 그림에서는
실제로 어린아이의 관이었음을 입증한 것이다.

 

 

 

 

 

 

 


바르비종(Barbizon)은 밀레나 루소의 활동무대였다.

파리의 아틀리에 틀어 박혀서
아카데믹한 그림만 그리고 있는 어용화가들과
인연을 끊고 농촌으로 이주해 움직이는 농민의 모습을 그린
테그드로, 루소, 밀레, 디어스테라페나 등의 미술혁명가들이
농민과 함께 생활하던 곳이다.

 

 

Jean-françois Millet French, 1814-1875(자화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