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합/주님의 향기

훈련병 기다리는 수녀님

수성구 2021. 11. 29. 03:25

훈련병 기다리는 수녀님

 

훈련병 기다리는 수녀님

(배영미 수녀)

 

필승!

나는 해병대 훈련소 성당에서 일주일에 한 번

훈련병들을 만나기 위해 성당 곳곳을 꾸미고.

그들의 교리도 담당하고 있다.

성당 청소는 해도 해도 끝이 없다.

벌레들 사이에 최적의 공간으로 소문이 났나 보다.

1층성전은 반지하처럼 내려가. 어둡고 습한 탓에 의자 아래에서는

쥐며느리가 출몰하고 공간만 보이면 거미가 집을 짓는다.

 

 

군종병과 매일 쥐며느리를 쓸어 담으면서 동시에 거미줄을 제거한다.

일명 일타쌍피 작전이다. 휑한 공간이 삭막해 보일까봐 화분을 가꾸고

풀꽃을 꺾어 장식해 보는 것도 나의 일이다.

매 주일아침. 한 시간 남짓한 종교 활동 시간을 기다리며

설렘으로 일주일을 보냈는데.

요새는 이 기다림이라는 단어가 야속할 때가 많다.

 

 

지난 1년가 코로나로 거의 모든 일정이 중단돼 훌련병을 재데로 만나지도.

예비자 교리를 마무리하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종교활동이 허락되어 기쁜 마음으로 미사와 교리를 재개하면

또다시 어디선가 확진자가 증가해 일상은 다시 멈춤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나는 오늘도 기다린다.

일주일에 한 시간이라도 잔뜩 긴장한 모습의 훈련병들이 활짝 열린 문만큼이나

커다란 하느님의 품에서 위로를 얻는 날이 오기를..

힘들고 지쳤던 훈련의 무게는 내려놓고 장난치며 웃는 모습을 볼 수 있기를..

 

 

화창난 날이나 새로 입영한 훈련병들이 있을 땐 일부러 걸어서 출퇴근을 한다.

운이 좋으면 훈련을 받으러 나와 있거나.

식사하러 정렬해 있는 훈련병들을 볼 수 있다.

서로 편안히 쳐다볼 수 없는 상황이지만

`어? 저기 수녀님이 가네?

여기 성당이 가까운가 보네? 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 않을까 희망하며

최대한 천천히 걷곤 한다.

 

 

기다림이라는 단어가 가져다 주던 설렘을 다시 찾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종교와 점점 멀어져가는 이 시대 젊은이들이 종교 활동시간이 되면

자발적으로 찾아와 오랜만에 미사를 드리며

눈물이 났다고 이야기하던 모습이 떠오른다.

가끔 잘 웃고 열심히 훈련받는듯하지만

남몰래 속앓이 하는 훈련병을 만나기도 했다.

그럴 땐 잘하고 있다고. 너무 멋지다고.

어느 누구도 그렇게 할 수 없을거라고 위로하면서도

속으론 나도 눈물을 흘리기도 했는데...

 

 

오늘도 하느님께 힘을 청하며 기다린다.

언젠가는 조용하다 못해 적막감마저 도는 이 성전이

다시 북적거리며 의자 위에 깨알같이 적힌 훈련소 꿀팁을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읽어내려가는 훈련병을 다시 만날 수 있겠지.

그때까지 지치지 않으리라!

 

(가톨릭 다이제스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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