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간다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우리 인생이라는 걸 알면서도
실제로 구체적인
삶의 자리와 현장에서는 권력이든
금력이든 명예이든 더 움켜 잡으려 하고,
잃지 않으려 하고,
내려놓지 않으려는 추태를 보이는
우리 자신의 아담과 하와의 인간 본성과
몰골을 보면, 우리 자신이
진짜로 하느님의 모습을 닮은 존재인지
의심스러울 때가 있다.
죽을 때는 다 놓고 간다.
우리가 입는 수의에는 주머니가 없다.
저 가난을 모토로 사는 수도자들조차도
청빈하게 살아 수도 공동체의
불투명한 앞날을 위해 재산을 뒤로 해서
언젠가는 없어질 이 땅에 모아 놓으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언제 올지 모르는 그날 그시간을 앞두고,
교구 공동체이든 수도 공동체이든
종말론적 긴장감을 가지고,
그 공동체가 가진 재화를 이 시대에
하느님께서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그 일에
하느님을 대신해서 잘 쓸 때,
주님께서 끊임없이 강복해 주시며,
그들은 썩어 없어질 이 땅이 아니고
영원히 썩지 않는
하늘에 보화를 쌓게 되는 것이다.
인간은 천주 대전에
겸손하면 탐욕을 부리지 않는다.
자신이 하느님의 뜻이 있어 세상에
던져진 존재이고
이 세상이라는 백년도 안되는
자유의 시험 기간이 끝나면 이 세상에서
천년만년 사는 존재가 아니고
반드시 죽어야 하며,
그 다음 상선벌악이라는 심판이 있고,
영생 영벌이라는
영원한 자리가 마련된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자각하고 있다면
도무지 탐욕을 부릴 수가 없다.
참된 겸손이란
천주 대전에 인간 자신이 스스로
피조물이며 한계가 있는 존재란 사실과
불완전하고 나약한 존재이며,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며,
죽음과 더불어
육신은 한갓 먼지와 흙으로 돌아가고,
영혼은 심판을 받아 궁극적으로는
천당과 지옥이 결정된다는 걸 알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러니 자신의 이러한 주제 파악을
천주 대전에 할 줄 아는 것이 겸손이며,
자기 분수를 아는 지혜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자기 분수를 모르고 까불고,
과도한 욕심을 부리며,
끝도 없이 죽지도 않고 이 세상에 살며,
죽고 난 뒤에 지엄하신
하느님의 심판과
영원한 멸망과 벌이 없는 것처럼
착각하고 망상하며 사는 것이 문제이다.
그래서 죽을 때는 죽을 때이고 하면서
지금 회개하지 않고 마음을 바꾸지 않으며
끝까지 완고한 고집을 부리는 것이
문제이다.
전에도 한번 말했지만,
한문의 '탐'(貪)자는 '지금(이제) 금'(今)과
'조개 패'(貝)의 합성어이다.
지금 화폐를 움켜 잡고 있는 것이 '탐'자이다.
그리고
'청빈'(淸貧; 맑은 가난)의 '빈'(貧)자는
'나눌 분'(分)과 '조개 패'(貝)의 합성어이다.
화폐를 나누는 것이 가난할 '빈'자이다.
죽을 때에는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니까 재벌들도 그 후손들에게
끊임없이 재산 상속을 한다.
그러나 자신들이
실컷 먹고 마시고 누리고 난 뒤에
따로 떼어 놓거나 남아서
그 상속하는 재산들이 자신의 것이 아닌
하느님의 것인 줄 모른다면,
그래서 제대로 하느님의 영광과
교회와 사회의 공동선과 선익을 위해
바로 쓰지도 나누지도 않는다면,
그들이야말로 낙타와 바늘귀 문에 등장하는
구원받을 수 없는 부자가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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