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합/주님의 향기

내 인생의 천지개벽

수성구 2021. 11. 10. 04:05

 

내 인생의 천지개벽

 

 

11월 둘째주 연중 제33주일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고 내 말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마르 13.24-32)

 

내 인생의 천지개벽

(정도영 신부. 안동교구 마원 진안리 성지 담당)

 

2015년 파라과이라는 먼 나라에 가서 사목을 하게 되었다.

새로운 환경을 접하며 그곳 삶의 방식에 당황했었다.

흔히들 더운 나라 사람들은 게으르다는데 정말 그렇게 느리게 사는 줄은 몰랐다.

덕분에 우리나라의 행정 시스템이 얼마나 편리하고 빠른지 깨닫게 되었다.

 

 

주변을 보면 공사를 하다가 그만둔 집들이 많이 있었다.

우리나라 같으면 어떻게든 마무리를 지을 텐데 파라과이 사람들은 느긋하기만 하다.

어느 날 사제관의 인터넷이 되지 않아 인터넷 회사에 연락하니

다음 주에 시간이 된다며 기다리라는 답변만 받았다.

 

 

한국 같으면 내일 당장 올 텐데 아쉬워하며 좀 느리게 사는 곳이라

그런가보다 이해하고 널어갔다.

약속한 날. 오전에 오기로 했는데 오후가 되어서도 아무 연락이 없었다.

전화를 하니 내일 오겠다가 아니라 며칠 뒤에 오겠다는 것이다.

나는 다시 기다렸고 그들은 며칠 뒤가 아니라

그 다음 주가 되어서야 인터넷을 고치러 왔다.

 

 

성당 앞길에 수도가 터져 한달 넘게 길에 물이 계속 용솟음친 적이 있다.

수도사업소에서 모르나 싶어 연락을 해주었더니

6개월 뒤에야 공사를 시작했다.

한번은 400Km 떨어진 공소를 가는 중에 토속원주민 인디헤나가

국도를 막고 데모를 하고 있었다.

모든 차가 오도 가도 못하는 상황인데

누구 하나 짜증 내지 않고 마냥 기다리는 것이었다.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줄지어 선 차들이 엄청나게 밀려있는데도

갓길로 추월해서 앞쪽으로 나아가는 차가 없었다.

경찰들 역시 데모하는 사람들을 억지로 말리지 않고

그냥 스스로 비켜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게 기약없이 기다리다가 길을 터주어서 지나가는데

원주민들에게 항의하거나 경적 울리는 사람 없이 그냥 지나가는 것이었다.

파라과이에 살던 그 4년은 내 인생에 있어 천지가 개벽한 시간이 되었다.

삶에 대한 나의 태도가 많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다음에 다시 오라고 하면 짜증을 내거나.

줄을 서서 기다리는 걸 답답해하던 내가 한층 여유를 가지게 되었다.

오늘 안되면 내일 하면 되고 내일 안되면 내년에 하면 되고

내년에 안되면 안하면 되는 여유로움을 파라과이에서 배웠다.

 

 

복음에서 이야기하는 종말의 때는 세상이 변화해서 찾아오는 것이 아니다.

세상은 늘 자연의 순리대로 간다.

그 순리를 보고 자신이 때닫고 변화하는 것.

곧 자신이 변화하여 예수님을 맞이하는 것이 종말의 때이다.

 

(가톨릭 다이제스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