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부끄럽게 한 수녀님
10월 둘째주 연중 제23주일
가서 가진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마르 10.17-30)
나를 부끄럽게 한 수녀님
(정도영 신부 안동교구 마원진안리 성지 담당)
군 시절 나는 통신 가설병이었지만 군대의 온갖 가전제품 수리를 하고 다녔다.
앞으로 살아갈 때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하며...
그런데 제대 후 후유증이 생겼다.
전선이 엉켜있거나 전봇대의 전선이 정리되어 있지 않으면 속이 답답해 왔다.
전기배선이 엉망이면 그것부터 정리해야 했다.
가는 본당마다 모든 전선들을 정리하고 잘못된 스위치는 새로 설치했다.
신자들 보기에는 부지런한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내 마음에 들도록 바꾸는 것이었다.
안동에서 본당 신부를 할 때였다.
도시 성당이라 젊은 사람도 많고 본당 단체들 활성화도 잘되어 있었다.
특히 남성 성가대원이 많아 다른 본당에서 부러워할만했다.
그런데 좀 이상한 점이 있었다.
보통은 본당 수녀님들 중 한분이 성가대를 챙겨주시는데
수녀님 어느 누구도 성가대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 것 같았다.
거기다 분원장 수녀님이 성악을 전공하셨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성가대하고 다투었나 생각했는데 그것도 아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수녀님이 일부러 피하신 것이었다.
본인 눈높이로 성가대를 꾸리려고 하면 음악성이 떨어지는 사람은 내보내야 하고.
틀릴 때마다 잔소리를 해야 하니 그냥 내버려 두신 것이었다.
나처럼 음치에 가까운 사람들은 박자가 틀렸는지.
음이 틀렸는지 잘 모르지만 음악을 전공한 사람 귀에는 그것이 다 들려서
분심도 많이 들 텐데 수녀님은 평온함을 잃지 않고 계셨다.
성악을 전공한 자신이 성가대에 올라가는 순간 성가대를 끌어온
지휘자의 위치가 무너져버릴수도 있었다.
그동안 성가대원들이 잘 꾸러온 것들을 바꿔버렸다가 몇 년 뒤
다음 수녀님이나 본당 신부님이 다시 바꿔버릴 수도 있을 것이다.
사실 잘 되던 성가대가 그렇게 흩어지는 모습도 보았었다.
나는 엉켜있는 전선만 보면 답답해서 정리하고 마는데....
수녀님이 대단해 보였다.
사제로서 본당 공동체가 일구어온 모든 것을 내 마음에 맞추는
내 자신을 보고 부끄러움이 생겼다.
나는 길어야 4~5년 있다가 떠날 사람인데 마치 제집인 양
공동체를 내 마음대로 이렇게 저렇게 바꾸는 것은 조심해야 할 행동들이다.
물론 수도자뿐만 아니라 모두가 한번 생각해보아야 할 문제가 아닐까.
가진 것을 모두 팔고 나를 따라라...라는 예수님 말씀은
자신의 욕심을 버리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살기 위해
시작해야 하는 첫 번째라는 것이다.
타인의 눈높이에 자신을 맞출 수 있는 것.
그것이 바로 사랑의 시작이며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이 가진 욕심을 버릴 수 있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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