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日常)의 길목에서
일상(日常)의 길목에서
비 온 뒤의 햇살에 간밤의 눅눅한 꿈을
젖은 어둠을 말린다
바람에 실려 오는 치자꽃 향기
오늘도 내가 꽃처럼 자신을 얻어서
향기로운 하루가 될 수 있기를 기도한다
열매를 위하여 자신을 포기하는
꽃의 겸손 앞에 내가 새삼 부끄러워
창가에 홀로 선 한여름 아침
"마음속에서 우러난 소신을
가지고 있지만 결코 광신적이 아니며
애정에 넘쳐 있으나 결코 감상적이 아니며
상상력이 풍부하지만 결코 비현실적이 아니며
두려움을 모르지만
결코 생명을 경시하는 일이 없으며
규율에 순종해 가지만 결코 굴종 적이 아닌
사람들의 힘과 즐거움'에 대한
에릭 프롬의 말을 몇 번이고 묵상했다
길에서 손이 없는 사람을 만났다
키가 우리의 절반밖엔 안 되는
난장이 아가씨도 보았고
정신 나간 듯이 혼자서 히죽히죽
웃고 있는 어떤 청년도 보았다
육교의 난간에서 잘 팔리지도 않는
작은 물건들 앞에 외로이 쪼그리고 앉은
어느 아줌마도 보았다
매일 길을 가며
여러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데
그중엔 돌아서도 이내 잊혀지지 않는
슬픈 얼굴들도 많다
그들의 아픔 앞에 무력한 나
돌아와서 내 생활을 반성해 본다
이웃의 존재는 나를 흔들어 깨우는
종소리와 같은 것임을 깨닫게 된다
잠시 물이 안 나오는 데도
몹시 걱정이 된다
빛, 공기, 바람도 그렇듯이
무엇이나 없어 봐야 알게 되는 고마움
사람이 항상 고마운 마음을 잃지 않고
살 수만 있어도 그는 훌륭한 사람이리라
시장터를 지나 미사에 다녀온 날
시장터에 묻어 있는 이웃들의 웃음
한숨, 눈물... 삶의 흔적 모두를 사랑하며
때로 남에게 오해를 받는 것도
기쁨이 될 수 있는 이유는
이를 통해 내가 좀 더 작아질 수 있기 때문이다
교만, 허영, 이기심에 가려 제대로 볼 수 없던
나의 참모습을 찾기 위해
자신과 마주 앉아 진지한 투쟁을 하기도 하며
마음의 빈터를 마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언짢은 소리 듣기를 거부하지 않는다면
나의 삶은 훨씬 더 자유로우리라
피곤했던 몸과 마음을 눕히고 눈을 감으면
내 하루의 일과도 눈을 감는다
아침의 부활을 위해 밤에는 반쯤 죽는
연습을 해보는 순수한 도취
아무도 미워하지 않고
순한 어린이가 되는
착한 잠 속에서의 행복
때로는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는 잠속에서의 꿈
살아있는 동안
잠이 없다면 얼마나 팍팍할까
달콤하게 맛있는 잠을
평화롭게 겸허한 잠을 자도록
내게 허락하신 주여, 찬미 받으소서
-『이해인 클라우디아 수녀 ․ 시인』-
'백합 > 주님의 향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예수님께서 드신 가엾은 마음 (0) | 2021.08.31 |
---|---|
힘내라! 선한 영향력 (0) | 2021.08.30 |
신뢰의 눈빛으로 새로 태어난 여인 (0) | 2021.08.28 |
하느님의 은총안에 있다는 확실한 표지 (0) | 2021.07.29 |
자신이 환영받고 있음을 알라. (0) | 2021.07.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