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의 기도

탈리타 쿰

수성구 2021. 6. 29. 06:28

탈리타 쿰

한달 전 열흘도 채 못되는 기간동안

장례미사를 네차례 봉헌하고

여섯 분을 주님 대전에 보내드렸다.

장례미사를 연이어 봉헌하다 보면

오열하는 유가족과 친지 앞에 선 사제는

마치 죽음의 사자(使者)인 듯한

느낌을 강하게 받는다.

그리고 가능한

형식적인 성무집행자가 아니라

고인의 죽음의 의미를 되새겨 보고,

비통해 하며 못내 슬픔을 잊은 듯한

유가족들의 고통에 마음으로

함께하려고 노력한다.

이 짧은 기간동안 뇌리에 지울 수 없는

불의의 교통사고로 함께 가신

세분의 선생님들의 죽음이다.

지금도 언뜻 떠오르는 영안실

냉장실에서의 비참했던 모습들과

생전에 함께 대화하던 모습들을

생각하면 소름과 허탈이 교차된다.

텅빈 책상 위의 말없는 조화,

동료교사를 떠나 보내고 믿어지지

않는 표정을 지으며 일을

손에 잡지 못하는 선생님들,

정든 선생님을 잃어버리고 울부짖는

학생들, 30세 전후의 꽃다운

젊음의 아들을 잃어버린 부모님들과

유가족들의 슬픔,

특히 아내와 애인들의 통곡은

당사자가 아니고서는 형용할 수 없는

그 무엇임에 틀림없다.

생명을 받은 것도 죽음도 인간의 능력

밖에 있는 것임에 분명하고,

그러기에 생사와 운명의 절대권을

가지신 하느님께 귀의하고 인간의

한계를 고백할 수 밖에 없는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자신의 과오나 과실에 관계없이

인간적인 육정과 더불어

하느님이 계시다면 하필 나와

우리 가족에게 이럴 수가 있는가 하며

신의 부재를 절규하고 괴로워 한다.

이런 상황 속에 도대체 인간이

할 수 있는게 무엇이 있는가?

 

4년 전 26세 된 어머니가

유치부(幼稚部)인 아들을 업고

신호등이 없는 길을 건너다 덤프트럭에

치어 함께 죽었다. 그런데 그 자매는 당시

임신 9개월이었으니 셋이 죽은 셈이다.

장례미사 때 가지런히 놓여진

두 개의 크고 작은 관을 보면서

눈물을 흘리며 미사를 봉헌한

기억이 난다.

 

비참하게 홀로된 남편에게 삼우 때

예물을 돌려주니까, 결혼성소가

아닌 것 같다며

자신이 자라온 모(某) 기술센타로 돌아가

수사님들과 불쌍한 청소년들과 함께

남은 생애를 바치고 싶다고 하였다.

우리들은 한 생을 사는 동안

여러 유형의 죽음을 직간접적으로

체험하며 살아간다.

문제는 이 죽음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며

죽음을 극복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어차피 산 사람은 모두 죽을 인생이기에

모든 죽음은 나의 죽음으로 귀결되므로

죽음이 가져다 주는 교훈과 메시지를

찾고, 인간적인 차원에서 죽음을

초극하는 방법을 배워야 하는 것이다.

 

 

오늘 복음을 보면,

한 소녀의 죽음을 둘러싸고 있는

주변 사람들의 비극적인 모습들이

잘 그려져 있다. 어린 딸의 구제를 위해

체면과 위신을 모두 팽개쳐버린

회당장의 간절한 호소,

손쓸 새도 없이 죽어버린 소녀 앞에서

대성통곡하는 가족들, 이에 비해 죽음을

가사상태나 의식불명의 상태가 아니라

일종의 잠으로 간주하는

예수님의 여유있는 태도가 죽음에 대한

상반된 자세를 보여주고 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죽음의 세력이

전염병이나 어떤 고리처럼 소녀를

중심으로 주변 사람들에게 퍼져

있다는 것이다. 소녀의 시신으로부터

주변 사람들에게 전해지는 죽음에 대한

거부와 공포, 불안과 두려움은

하나의 간접적인 죽음이라 볼 수 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예수님의 탈리타 쿰'

이라는 말씀과 손을 잡는 행위로부터

다시 살아난 것은 비단 회당장의

딸만이 아니라 그녀의 주검 앞에서

절망과 비탄과 오열에 잠긴 가족들,

그리고 이 비극적인 상황을

무기력하게 바라보아야 했던

제자들이었던 것이다.

문제는 불완전하고 나약한

믿음의 소유자이며 우둔하고 이기적인

인간이라고 생각된다.

한달 전 불의의 사고의 원만한 해결을

둘러싸고 복잡한 내용들이

없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들의 슬픔과 비애를 나의 것으로,

들의 죽음을 나의 죽음으로 여기며,

밤을 새워 함께 기도하고 봉사한

동료교사들, 학생들,

본당 가족들의 사랑이 있었기에,

죽은 한 교사의 부친으로부터

감사의 편지가 일일이 전달된 것이다.

각박하고 메마른 사회의 현실 속에

자꾸만 상실되어가는 인간성의 선함을

사랑으로 회복시키는 것,

이것이 바로 '탈리타 쿰'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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