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받는 데에 필요한 이름
종교 사회학에서는 교의(dogma)체계,
계율체계(계명과 윤리 도덕),
의식체계(예배)라는 세 가지 요소가
있으면 다 종교라고 명명한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교에서는
'종교(宗敎)란 절대자 하느님과
그 피조물인 인간과의 생명(生命)의
관계'라고 정의한다.
그러니까 그리스도교적 관점에서
엄격하게 말하면,
자신의 존재와 생명의 근원이요
목적이신 절대자 하느님을
믿지 않으면 종교가 아닌 것이다.
종교 다원(多元)주의 사회에 몸담고
살면서 이런 말을 하면, 나를 정신나간
사람으로 취급할 줄 모르지만,
예수님께서는 요한 복음 14장 6절이하에서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고 분명히
말씀하셨다.
사도행전 4장 12절에서도
"그분말고는 다른 누구에게도 구원이
없습니다. 사실 사람에게 주어진
이름 가운데서 우리가 구원받는 데에
필요한 이름은 이 이름 밖에 없습니다."
라고 베드로 사도가 분명히 말씀하신다.
고타마 싯타르타, 마호메트, 공자, 맹자,
노자, 장자 등등 성현, 군자의 한 사람으로
예수님을 생각하면 안된다.
예수님을 그들 성현, 군자들 중의
한 사람으로만 생각하는 것은
인본주의적 사고방식이다.
우리가 신앙하는 예수 그리스도는
단지 2,000년전 팔레스티나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33년이라는 한정된 시간을
살다가신 역사의 예수가 아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그 역사의
예수를 믿음의 그리스도, 생명의 주님,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로서 믿는다.
예수님의 인성(人性)만을 받아들이고
신성(神性; 天主性)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종교 다원주의의 맹점은 예수님의
신성(神性)을 거부한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그런 성현, 군자의 한 사람이고,
모든 종교에 구원(救援)이 있다면,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왜, 무엇 때문에
이 땅에 사람의 아들로 오셨으며,
무죄하신 분이 인류 구원 사업이라는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 사흘만에
부활하셨다는 말인가?
타종파나 타종교의 구원 문제와
익명의 그리스도인의 구원 문제에
대해서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도
언급하고 있으니,
인간이 이렇다 저렇다 할 문제가
아니며, 하느님의 영역이고 소관이다.
다른 종교에도 부분적인 진리가
다 있지만, 완전한 진리, 절대 진리,
진리 자체이신 하느님이 계신 것이다.
유교는 한마디로 사람답게 사는
윤리도덕을 가르치는 교육학이고,
불교는 인생의 고(苦)의 원인을
사람의 탐욕에서 보고 그것에서
해탈하는 길을 가르치며
삶의 지혜를 가르치는 철학이며,
그리스도교만이 초자연적
계시(啔示) 진리를 가르치고, 구원으로
인도하는 참된 종교인 것이다.
물론 타종교에서 수덕적(修德的)
차원에서 배울 것이 많고, 함께
인류의 평화와 복지와 번영을 위해
노력해야 하는 사명을 가지고
사이좋게 지내고
공생공존(共生共存)할 수 있다.
하지만 내가 가지고 있는
참된 진리(眞理)라는 보화와 영원한
생명의 복음 자체이신 그리스도 예수와
그분의 복음적 가치관을
다른 어떤 종교적 가치 체계와도
나는 바꿀 수가 없다.
그러기에 우리 선조들도 스스로
유불선을 연구하면서 천주학을
천주교로 섬기게 되었고,
박해 시대에 순교로서 신앙의 진리를
증거하고 하느님을 증거했던 것이다.
종교 다원주의 사회에 살면서 아무리
좋은 게 좋다고 하고, 같이 가야 한다고 해도
내가 가진 복음을 전해야 하는 사명은
사도 바오로의 고백처럼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있는 것이다.
수발을 들던 어느 불자가 어느
그리스도교 병원 호스피스 병동에서
그리스도인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의
마지막 죽는 장면을 보고,
자신과 병실의 아버지께 세례를 달라고
원목실에 찾아가 간절히 청해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천주교 노사제가 죽음의 순간에
하느님께 불평, 원망을 하여 너무나
주변의 사람들에게 부끄러웠다는 어느
봉사하는 수도자의 이야기도 들었다.
죽기 전 마지막에 세 가지 성사
(고해, 병자, 성체)를 다 받는다 하더라도,
제대로 영혼 준비가 안되어 있으면
이렇게 어둠이 본성을 타고
들어오는 것이다.
늙어 죽을 때가 다가오면, 본인 스스로
대,소변을 못 가누고 주변의
사람들에게 의지할 수 밖에 없다.
마치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나
갓난 아기때 다른 사람들이 기저귀를
갈아 주듯이 말이다.
이렇게 처음과 끝은 하느님 대전과
사람들 앞에 비슷한 모습을
취하게 된다. 죽을 때에는
어린이가 되어 나의 마지막 자존심도
내려 놓아야 생(生)을 마감하게 된다.
하지만, 우리 영혼의 모습은 다르므로,
마지막 죽음의 준비는
평소 믿음과 기도 생활이
결정지워 주는 것이기에 노인 사목이
참 필요하다고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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