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합/주님의 향기

이 사람을 데리고 갑시다!

수성구 2020. 10. 29. 06:00

이 사람을 데리고 갑시다!


(엠마오로 가는길 송현신부)

 

 

티벳의 성자로 불린 인도의 선다 싱이 눈보라 속에서 네팔의 산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멀리서 여행자 한 명이 다가 왔는데 방햐이 같아 동행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얼마쯤 걷다가 눈 위에 쓰러진 한 노인을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싱은 우리 이 사람을 데리고 갑시다! 라고 동행자에게 말했습니다.

그러자 그 동행자는 버럭 화를 내며 그게 무슨 말이오?

이 추위에 저 노인까지 끌고 가다가는 모두 죽고 말것이오! 하면서 먼저 가버렸고

싱은 노인을 업고서 눈보라 속을 걸어갔습니다.

어찌나 힘들던지 그의 온몸은 이내 땀으로 젖어들기 시작했습니다.

얼마 후 그의 등에서 온기가 발산되면서 업힌 노인이 차츰 회복되었습니다.

 

 

그렇게 둘은 서로의 체온으로 한파를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마침내 그들은 어느 마을 어귀에 도착하게 되었는데

거기에 꽁꽁 언 채로 죽어 있는한 사내의 시체가 있었습니다.

시체를 살펴보던 싱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 시신은 바로 자기 혼자 살겠다고 앞서 간 동행자 였던 것입니다.

 

 

톨스토이는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은 남을 사랑하라는 말이 아니라

나에 대한 사람을 멈추라는 말이라 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자기 혼자 잘먹고 잘살겠다고 하는 사람은

결국 구원을 얻지 못한 채 죽고 말 것입니다.

인생은 결코 혼자서 걸어가는 여정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사랑을 그분께 직접 표현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웃은 언제나 볼 수 있으며 그들에게 사랑을 베풀 수도 있습니다.

바로 그 이웃에게 해주는 것이 주님께 해드리는 것입니다.

(마태 25.40)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도 사랑할 수 없습니다(1요한 4.20)

 

 

그렇긴 해도 살아가면서 사랑하는 사람보다 미워하는 사람이 갈수록 많아지니

이웃 사랑을 불가능한 일로 제쳐놓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아무리 주님의 말씀이라 해도 사랑을 강요하지는 못합니다.

극히 당연한 말입니다.

사랑은 강요할 수 없는 행위입니다.

강요한다고 해서 될 일도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데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이 있습니다.

곧 이웃 사랑의 계명은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이상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읽고 듣는 것만으로는 이해되지 않습니다.

오로지 그 말씀을 실제로 행할 대에만 온전히 이해하게 되면.

또 그래야 그분을 믿는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