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합/행복 가득한곳

어른됨의 아픔

수성구 2020. 5. 19. 05:49

어른됨의 아픔


     

차 한잔의 사색


*◐ 어른됨의 아픔 ◑* 

가졌다는 것 때문에 부러음 받고
가졌다는 것 때문에 자랑도 하고
그래서 그것이 행복이라 하며
높다는 것 때문에 부러음 받고
높아졌다는 것 때문에 자랑도 하고
그래서 그것이 최고라 하는데
가진 것 내 것이라
마음대로 할 수 있다 생각될 때
내가 노력해 얻었다고
아무에게나 줄 수 없다 생각될 때
내 가진것 중 대부분
남이 가져야 할 것인데
빼앗은 것을 기억해야 한다
내가 이처럼 갖게 되었음은
다른 많은 이들의
희생이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나는 가진 것이 아니라
맡은 것이다
높은 것 최고라고
낮은 자 모두 이용하겠다 생각할 때
지금까지 들어간 것 많았으니
다 보상 받겠다 생각될 때
나보다 더 노력한 이
나보다 더 낮은 데 있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나보다 더 노력한 이
덜 받은 댓가로도 침묵하는 것
기억해야 한다
나는 낮아져야 한다
우리 살아가며
점점  가지게 될 때
점점 높아질 때
더욱 더 나누어야 하며
더욱 더 낮아져야 한다
내 마음대로 사는 것 아니라
남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자기 마음대로 쓰던 자들로 인해
피해 입던 것을 기억해 보자
어른은 가진 자가 되었다고
높은 자가 되었다고 되는 것은 아니다
하기 싫은 것도 할 수 있도록 해보자
가고 싶지 않은 곳도 갈 수 있도록 해보자
옳은 것이라면
좀더 참고 기다려 보자
혹 내 인생에
무엇 얻을 것이 있으면
그것을 필요로 하는 이에게 주자
혹 내 인생에
어떤 자리가 생기면
그 자리를 찾는 필요한 인물을 찾자
어른됨이 권위보다는
어른됨의 아픔을 감수하며
위장된 어른이 아닌 진실한 어른으로
우리 맡은 자의 양심을 지키며 살자

 / 민들레 영토 「공간을 채우는 사랑」 중에서

 

  삶의 통찰을 통한 인생의 발견과 깨달음  


멈추게 하지 마라. 집에 놓여 있는 많은 정물들은 나의 시간을 지켜본다. 밤을 함께 맞이하고 낮을 함께 지내는 이곳은 나의 집이다. 정물들을 바라보면서 어느 날 고맙다는 생각과 함께 시간의 영속성에 대해서 생각해 본다. 정물이라고 명명된 저 사물들은 적어도 나보다 어쩌면 몇 십 년은 더 오래 갈 수 있다는 생각에 미치니 시계나라에 와 있나 하는 착각이 생긴다.

시간을 지배하면서 버티고 있는 것은 나일까, 저 시계일까, 생각이 들자 정물을 앞설 방법도 이길 방법도 무엇 하나 없음에 미력해진다. 갑자기 바보가 된 듯하다. 과연 인간은 위대한 것인가. 무엇이 저 시계보다 정직하고 분명할 수 있는가. 시계 밥을 잘 챙겨주는 내 남자는 시간 앞에서 한수 위인가? 그는 시계나 달력을 멈추게 하지 않는다. 때만 되면 정확하게 건전지를 갈아 끼워주고 달력을 한 장 넘겨준다.

멈추게 하지 마라. 당신의 심장이 뛰는 한 함께하는 사물의 심장도 뛰게 해라. 벽에 걸려 있는 시계가 잠들기 전에 건전지를 바꿔주고, 호숫가 앞에 걸려 있는 달력도 매 월마다 새 얼굴이 보이게 하라.

그 정물들이 이 세상에서 어느 한 개인과 인연을 맺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숨 쉬게 해주는 일, 그것은 함께 공간을 공유하는 입장만으로도 사람으로 선행해야 할 정물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이다. 그런데 시계의 휴식은 언제인가 건전지 빼면 심장이 멈추어 선다. 계속 초침은 돌려야 하는데, 그래도 멈추어 선 만큼 볼 수 있는 혜안을 가질 수 있다면 멈추는 것도 좋을 것이라고 누가 명명할 것인가.


- 「정물에 대한 고찰」 중에서

풍경은 공간을 비워 놓을 때 바람을 안아 소리를 낼 수 있습니다. 소리는 공간을 통해 자기 밖으로 나가는 순수한 외출입니다. 소리는 공간이 자기와 맺는 관계로서의 탈 자아입니다. 소리의 탈출, 공간을 벗어남은 내 마음에 귀 기울여 자신의 소리를 듣는 것입니다. 분노함에 서두르지 말며, 비난함에 조급하지 말며, 질책함에 욕심내지 말자고 내면에 잠든 사유를 두드려 깨우는 소리입니다.

가을날에 바바리 깃과 잘 어울리는 한 사람이 있습니다. 가을을 충전하는 사람입니다. 자신을 마주 볼 줄 아는 사람입니다. 어느 정도의 자유로움을 절제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벌레 먹은 사과 한 개의 상처라도 읽어내려고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여름을 견디어온 눈빛 끝에도 지치지 않는 열정을 지니고 삶의 고난(苦難)도 평온으로 바라볼 수 있는 사람, 시월의 풍경소리를 제대로 듣는 사람입니다.

상강(霜降)의 길을 걸으면서도 생의 온기를 느끼며 어느 일순간 웃음이 절로 다가오면 큰소리로 ‘하하하’ 웃을 줄 아는 사람, 아무런 목적이 없는 말에도 미소와 끄덕임으로 익숙한 마음을 읽을 줄 아는 사람. 편안한 풍경으로 자신의 공간에 제 몸 흔들어 울려주는 풍경이 아니더라도, 비록 가을빛을 닮은 평행선에 서 있지 못한다 해도 캔버스에 내 삶을 자유롭게 스케치하고 싶습니다. 데카르트적 성찰이 아니더라도 감사하다는 마음으로 추녀 끝에 풍경하나 달고 싶습니다.


- 「바람과 풍경(風磬)」 중에서

현란하고 힘차 보였던 계절은 이제 무채색의 경계를 끌어당기고 있다. 하루가 다르게 들판은 황금빛으로 가득차 가고, 간밤에 내린 서리가 흰 머리카락처럼 반짝이면서 하룻밤 사이에 세상을 무채색으로 색칠하고 있다. 저기, 햇볕에 구릿빛으로 얼굴이 그을린 노인이 호박을 팔고 있다. 서리를 맞았는지 갈무리 새끼 호박이 딱딱해 보여 제 맛으로 먹을 수 있는지 궁금하기도 하다. 노인은 “집에 가서 먹어 보면 알아” 하면서 아주 맛있다고 장담을 한다. 잎들은 서릿발에 시들어 가지만 마지막 기운을 열매에 쏟아 부어 호박은 매우 단단해지고 맛이 든다는 것. 우리의 오장육부가 제 할 일을 하며 생명을 유지시키듯이 잎과 줄기는 제 할 일을 마치고 시들어 가지만 그만큼 열매는 미래를 기약하며 단단하게 영근 호박으로 남는다는 것. 이제 더 이상 ‘노지호박’은 나오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 나는 주저 없이 소쿠리채로 호박을 주워 담았다.

서리가 내리면 가을은 끝나간다. 자연의 신호는 가차 없이 한 생명을 거두고 또 다른 생명을 준비하는 혹독한 겨울을 우리에게 보내준다. 서릿발은 차갑고 매몰차다.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는 속담을 이제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단 한 번의 힘으로 계절의 흔적을 완전히 뒤바꾸어 버리는 서리, 그것은 가을에서 겨울로 가는 시간의 다리를 앞당겨 놓아 주는 숙살지기(肅殺之氣)의 힘을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

산책길 저쪽에서 노인 두 분이 지나가면서 말씀을 나눈다. “오뉴월 서릿발이 어떻다고? 아니, 할망구가 한을 품으면 어떻다고? 에구, 사는 게 뭔지 모르겠어. 그야 서리 맞지 않으면 다행이지….”

시나브로 단풍이 떨어지기 시작한 숲길은 조금씩 비어가고 을씨년스러워진다. 내 삶의 가을은 어디쯤 오고 있을까? 아직은 푸르고 뜨거운 열정이 넘친다고 생각하는데 내 머리에도 서리가 내려앉기 시작한다. 아! 아직 나는 여물지 않았는데, 아직 열매도 제대로 맺지 못했는데…….


- 「서리 맞은 호박」 중에서

어느 날, 사진을 찍다 보니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길이 아닌 다른 길로 들어섰다. 일기예보를 거스르고 비가 내리기 시작한 것이다. 예고되지 않은 이 비는 언제까지 내릴까. 허공을 죽죽 그어대며 내리는 장대비는 내게 점점 두려움을 안긴다. 숲길이라 지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숲 속을 더욱 어두컴컴하게 짓누르는 빗줄기는 보잘것없는 작은 여인을 두려움에 떨게 한다. 마침 숲 언저리에 비닐하우스 하나가 나타났다. 잠시 비를 피할 요량으로 비닐하우스 안으로 들어가 앉았다. 오로지 비만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이 비가 그치면 신록이 더 우거질 수 있을까. 한동안 멈추어 버린 문장의 씨앗들이 무럭무럭 자라나면 좋으련만….

빗속의 상념은 오래 가지 않았다. 계속해서 내리는 빗줄기를 바라보니 비가 언제 그칠까 하는 걱정이 밀려왔다.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관성이 발동했기 때문이다. 어둑해지는 빗속에서 어깨에 메고 있는 카메라가 왠지 든든한 친구 같다. 머무르지 않는 비의 모습을 순간 정지시켜 보겠다는 생각으로 셔터를 눌렀다. 카메라에 비친 비는 나풀나풀 보라색 치맛자락을 흔들면서 춤추는 것 같기도 하다. 연극이 끝나서 커다란 장막이 일시에 내려오는 듯하다.

“요 녀석들, 오늘 천상에서 땅으로 출타하는 너희는 말썽꾸러기임에 틀림없다!”

나의 질타와 호통에도 상관없이 하늘에서 장대비는 계속 내린다. 요란스럽게 소리 내어 붉은 낙수가 되어 도랑을 채우고 범람하여 밭을 덮는 빗물의 위력은 눈앞에서 실감할 정도로 대단하다. 하지만 영원한 것은 없다. 비는 시간의 흐름 속에 스스로를 멈추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뽀얀 안개 둘러치며 어둠과 함께 밤으로 숨어들어 가고 있다.

짙어오는 어둠, 그리고 비,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오자 갑자기 서글퍼진다. 혼자라는 사실이 익숙하지 않아서 그런 걸까. 우연이라도 남편의 전화가 걸려왔으면 하고 바랐지만 평상시에는 잘만 걸어오던 전화도 걸려오지 않는다. 살갑게 굴던 큰아들 녀석도 군대에 가 있어 연락해 오지 않았다. 정작 필요할 때는 아무도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자 새로운 오기가 생긴다. 이 비를 어떻게 뚫고 가야 할까?

‘고립’이라는 낱말이 불현듯 떠올랐다. 어쩌면 우리는 고립으로부터 도피하기 위해 누군가를 찾는 것일지도 모른다.

- 「비 오는 날의 상념 1」 중에서

/ '풀꽃에 머무는 바람의노래' 유선자의 수필세계



  삶에서 잃을 것은 아무것도 없다  




삶에서 잃을 것은 아무것도 없다. 
아무것도 우리는 잃지 않는다. 
어떤 경우에도 
“난 이러이러한 것을 잃었다”고 말할 것이 아니라 
“그것이 제자리로 돌아갔다”고 말하라. 
너의 자식이 죽었는가? 
아니다. 그들은 본래의 위치로 돌아간 것이다. 
너의 배우자가 죽었는가? 
아니다. 그는 본래의 자리로 돌아간 것뿐이다. 
너의 재산과 소유물을 빼앗겼는가? 
아니다. 그것들 역시 본래의 위치로 돌아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것이다. 
세상이 허락했기 때문에 
넌 현재 이러저러한 것들 갖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들이 네 곁에 있는 동안에 
그것들을 소중히 여겨라. 
여행자가 잠시 머무는 
여인숙의 방을 소중히 여기듯이.
 
/ 에픽테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