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미사 중에는) 출산일을 앞둔 여성들을 위해 기도했으면 좋겠습니다. (네, 요즘 시기) 조만간 엄마가 될 임산부 분들은 불안하며 근심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하여, 드는 걱정이란, "우리 아이가 살아갈 세상은 어떤 세상인가?"라는 질문이죠. 이에 주님께서 이들에게 (먼저) 자기 자녀들을 (기꺼이) 낳을 용기와 더불어 그 자녀들이 살아갈 세상은 분명 새로우며 늘 주님의 사랑을 가득히 받을 것이라는 확신을 주시도록 기도합시다.
[입당송] 주님은 당신 백성을 안전하게 이끄시고, 그 적들을 바다에 빠뜨리셨네. 알렐루야. (시편 78, 53)
-강론 말씀-
(잘 알다시피) 제자들은 어부였더랬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분명 그 일을 하고 있는 가운데 그들을 부르셨죠. (네, 부르심 당시) 안드레아와 베드로는 그물을 손질하고 있었습니다. 한데 그들은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죠. (아울러) 요한과 야고보도 마찬가지 였습니다. 네, 그들은 함께 일하고 있던 아버지와 형제를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하여 그들의) 부르심/소명이란, 분명 어부라는 그들의 소임 안에 있었던 셈입니다.
그런데 오늘의 복음 말씀인 이러한 고기잡이의 기적 이야기는 우리로 하여금 루카가 전한 (루카복음 5장의) 또 다른 고기잡이의 기적을 생각하게 합니다. 네, 그 이야기에서도 오늘과 같은 일이 벌어졌죠. (다시 말해) 그들은 그동안 결코 생각해보지 못한 만큼의 많은 물고기를 잡은 겁니다. 당시, 예수님께서는 설교를 마치신 후 "호수로 나아가라"고 말하셨죠. (그러자 그들은) "밤새도록 저희가 일했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그럼에도 예수님께서는) "가 보거라" 하십니다. 이에 베드로는 "선생님의 말씀대로 그물을 던지겠습니다"라고 답하죠. 그러고는 엄청난 양의 물고기를 잡습니다. 하여 복음은 "몹시 놀랄 만큼 물고기를 잡았다"고 전합니다. 네, 그 일은 기적이었던 거죠.
(한데) 오늘의 또 다른 고기잡이 (기적)에서는 이러한 놀라움을 말하지 않습니다. 네, 우리는 어떤 단순한 자연스러움을 보게 되죠. 곧, '주님과의 친밀함'과 '주님에 대한 앎 속에서' 어떤 발전 내지는 진행이 이루어졌음을 보게 됩니다. 하여 저는 이를 두고 보다 정확하게 '주님과의 가족과 같은 친숙함 속에서' 라고 말하고자 합니다. (실상) 오늘 복음에서 요한은 (단박에) 베드로에게 "주님이십니다!"라고 말하니까요. 그리고 베드로는 주님께 가기 위해 옷을 챙겨 입고 물로 뛰어 들죠.
그런데 처음에 베드로는 그분 앞에 무릎을 꿇고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인입니다"라고 말하던 이였습니다. 하지만 이번 경우에는 그런 말이 전혀 없이 아주 자연스럽죠. 네, 그 누구도 "누구십니까?"라고 묻지 않습니다. 제자들은 (이미) 그분이 주님이시며 주님과의 만남이 진짜이라는 걸 알았으니까요. (이른바) 사도들의 '주님과의 가족 같은 친숙함'이 성장한 것입니다.
아울러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각자의 인생 여정 속에서, 이러한 주님과의 가족 같은 친숙함이 성장하고 발전하는 과정을 겪고 있습니다. 따라서 주님은 어찌 보면 "손을 잡고"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왜냐하면 그분께서는 우리와 함께 걸으시며 우리는 그분이 주님이심을 알기 때문입니다. 네, 오늘 복음에서 아무도 "당신은 누구십니까?"라고 묻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주님이심을 알고 있었으니까요. (하여) 이러한 주님과의 일상에서의 가족 같은 친숙함이 바로 그리스도인이 지녀야 할 바입니다.
그리고 분명 이 날, 그들은 함께 물고기와 빵으로 아침식사를 하며 자연스러운 일상과 관계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을 것이 확실합니다. 하여 그리스도인들이 지니는 주님과의 이러한 가족과 같은 친숙함은 늘 공동체적입니다. 곧, 이것은 분명 개인적이고 내밀한 것이지만 또한 공동체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거죠. 그러므로 공동체가 없는 (주님과의) 친숙함이나, 빵(의 나눔) 없는 (주님과의) 친밀함 그리고 교회나 신자들 혹은 성사 없는 (주님과의) 가족 같음은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모릅니다. 네, 이러한 류의 것들은 일종의 영지주의적 친숙함이 될 수 있죠. 그러니까 오직 나를 위한, 하느님 백성으로부터 나를 분리시킨 (주님과의) 친밀함 말입니다. (허나) 사도들의 주님과의 가족 같음은 늘 공동체적이었으며, 항상 공동체의 상징인 식탁에서 드러났습니다. 네, 언제나 성체로서의 빵과 함께 이루어졌죠.
(한데)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는 까닭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러한 전염병 대유행 시기가 초래하는 여러 위험들에 대하여 제게 염려를 나타내신 분들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곧, 전염병으로 인해) 우리의 모든 소통행위들이 심지어 종교적인 것들마저도 미디어를 통해 이루어지며、 미사까지 각종 소통매체들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거죠. (하지만) 우리 모두는 친교를 나누고 있습니다. 물론 (물리적으로) 함께는 아니지만 영적으로는 함께 말입니다. (하여) 모인 군중은 적을 지라도, (여전히) 거대한 하나의 백성이 있습니다. 네, 우리는 비록 함께 있지 않지만 모두 함께 있으니까요. 그리고 이는 성찬례도 마찬가지죠. 네, 오늘 우리는 성찬례를 거행할 것입니다. 아울러 많은 분들이 우리와 함께 할 것입니다. 영적 친교로써나마 말입니다.
물론 이것이 (일상적인) 교회는 아닙니다. (소위) 주님께서 허락해주신 어려운 상황 속에서의 교회라고 할 수 있겠죠. 하지만 교회의 이상은 언제나 백성과 함께하며 성사들을 거행하는 것입니다. 항상 말입니다. (하여) 부활 대축일 전, 제가 부활절을 텅 빈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지내겠노라는 소식이 전해졌을 때, 어떤 주교님께서, -네, 그분은 무척이나 좋으신 주교님이십니다- 저에게 편지를 쓰셔서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뜻을 전하신 적이 있습니다. "도대체 왜, 그렇게 큰 성 베드로 대성전에 최소한 30명도 입장시키지 않으십니까?" "사람들을 만나려는 취지에 맞아야 하지 않습니까?" "위험이 그렇게 있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만..." 이라고 하시면서 말입니다. 이에 저는 당시 "대체, 내게 말씀하시는 바가 무엇일까?"하고 생각했었더랬습니다. 네, 그 순간 저는 잘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분께서는 신자들과 무척이나 친밀한 아주 좋은 주교님이셨기에 무언가를 제가 말씀하시고 싶었던 거죠. 이에 그분을 뵙게 되면 다시 여쭈어 볼 것입니다만...
이후 저는 (나름) 이해를 했습니다. 그분께서는 제게, "교회를 바이러스화 하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성사를 사람들이 바이러스의 온상으로 여기지 않도록, 신자들을 바이러스화 하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너무 과민한 반응은 과장과 차별을 만들기에...] 교회와 성사들 그리고 하느님의 백성은 우리의 핵심이니까요. 따라서 이 엄혹한 시기 우리는 이러한 방식으로 주님과의 친밀함을 나눌 수밖에 없지만, 이 터널을 벗어나도록, 이런 방식에 머물지 않도록 우리는 조심해야 하는 게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사도들이 지녔던 (주님과의) 가족 같은 친숙함입니다. (결코) 영지주의적 -지식차원으로만 받아들임-이지 않으며 서로를 바이러스화 -위험하고 피할 것으로 생각-하지 않고 각자만의 이기적이지 않은 친숙함 말입니다. 사도들이 지녔던 것은 백성들 안에서의 구체적인 가족 같음이었으니까요. (그럼요) 주님과의 가족 같은 친숙함은 일상의 삶 속에서 그리고 성사들과 하느님 백성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하여 사도들은 이러한 주님과의 가족 같은 친숙함 속에서 일종의 성숙하는 여정을 거친 셈입니다. 그리고 우리 역시 이를 익혀야 하죠. (실상) 첫 순간부터 그들은 (주님과의) 가족 같음이 그동안 상상하던 것과는 다름을 이해했고, 이제 여기에 이르렀습니다. 네, 제자들은 모든 것을 함께 나누었던 그분이 주님이심을 알았습니다. 공동체, 성사들, 주님, 평화, 잔치...(모든 것을 함께 했으니까요)
그러므로 주님께서 우리에게도 이러한 그분과의 밀접함과 가족과 같은 친숙함을 가르쳐주시길 빕니다. 다만 교회와 성사들 안에서 그리고 거룩한 하느님의 백성들과 함께 그러하길 빕니다.
-성찬례 후 영적친교로의 초대-
성찬례에 직접 참여할 수 없는 분들은 이제 영적친교로나마 일치를 이루어 봅시다.
오, 나의 예수님.
당신 발아래 엎드려 저는 그 자체의 심연과 당신의 거룩한 현존 안에 침잠하며 뉘우치는 제 통회의 마음을 당신께 올립니다.
저는 당신 사랑의 성체 안에서 당신을 흠숭하며 제 마음을 당신께 봉헌하는 이 초라한 거처 안에 당신을 맞아들이길 희망합니다.
성체를 (직접 영하며 누릴) 친교의 행복을 기다리며 저는 영적으로나마 당신을 모시기를 원하오니, (부디) 저에게 오소서. 오, 나의 예수님. 제가 당신께 가리이다. 당신의 사랑이 생명과 죽음을 통해 저의 온 존재를 불타오르게 하소서.
저는 당신을 믿으며 당신께 희망을 걸고 당신을 사랑하나이다.
[성모찬송: Regina caeli]
Regina caeli, laetare, alleluia 하늘의 모후님, 기뻐하소서. 알렐루야 Quia quem meruisti portare, alleluia 태중에 모시던 아드님께서, 알렐루야 Resurrexit, sicut dixit, alleluia 말씀하신 대로 부활하셨나이다. 알렐루야 Ora pro nobis Deum, alleluia 저희를 위하여 하느님께 빌어주소서. 알렐루야 . . . 그러므로 바짝 정신차릴 일이다 이러한 온라인을 통해서도 영적으로 하나를 이룰 수 있다는 신앙의 신비에 대한 이해와 함께, 그럼에도 우리의 신앙은 늘 공동체적이고 구체적인 삶 안에서 찾아야 함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