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중에서도) 특히 홀로 계신 분들이나 요양원에 머무시는 분들을 위해서 말입니다. 네, 그분들은 (혹시나) 홀로 죽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을 가지고 계시니까요. 하여 그분들에게는 이번 전염병 대유행이 특히나 더 위협적으로 느껴지는 것이 사실입니다. (한데) 그분들은 우리의 뿌리이자 역사이십니다. (실상) 그분들께서 우리에게 신앙과 전통을 물려주셨고 조국에 대한 소속감을 전해 주셨으니까요. 그러므로 이러한 (엄혹한) 시기에 주님께서 그분들 곁에 가까이 계셔주시기를 기도합시다.
[입당송]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은 이들아, 와서,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된 나라를 차지하여라. 알렐루야 [마태 25, 34]
-강론 말씀-
어제 우리는 충직함과 신실함의 모범으로서의 마리아 막달레나에 대하여 묵상했었습니다. 곧,'하느님께 대한 충직함'을 알아보았죠. 한데, 이러한 하느님께 대한 신실함은 어떻게 하는 거죠? (그리고 이것은) 어떤 신을 향한 걸까요?
(그 답은) 당연히 신실하신 하느님께 하는 겁니다. 사실 우리의 충직함이란, 하느님의 신실하심에 대한 응답일 따름이니까요. (그럼요!) 당신의 말씀과 약속에 충실하신 우리의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과 함께 걸으시며 당신의 약속을 당신 백성에게 지켜 나아가십니다. 네, 그분께서는 약속에 충실하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약속에 충실하시기에, 하느님께서는 대대로 당신을 백성들의 구세주로 여기게끔 하십니다.
(하여 오늘 독서에서) 태어날 때부터 불구였던 다리를 새로 해 주심으로써 그를 치유하신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시는 하느님이십니다. 아울러 이렇게 치유하시는 하느님은 언제나 당신 백성에게 위로를 주시는 분이시죠. (따라서 우리의 하느님은 이른바) 재창조하시는 하느님이십니다. (그리고) 이러한 새로운 재창조가 우리를 향한 그분의 신실하심입니다. (실상) 창조보다 더 기묘한 재창조이니까요. (하여 우리의 주님은) 계속해서 나아가시며 작업하심에 있어 지치지 않는 하느님이십니다. 네, 여기서 우리가 '작업한다'고 하는 것은 신학자들이 (소위) '역사하신다'라고 하는 말입니다. (당신) 백성들을 앞으로 이끌어 주기 위해서 말입니다.
더불어 그분께서는 소위 우리가 말하듯 '지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시죠. 마치 (착한) 목자가 집에 돌아가 양 한 마리가 없어진 것을 알고는 (다시) 밖으로 나가 잃어버렸던 양을 찾으러 나서는 것처럼 말입니다. 네, 이 목자는 여벌의 일을 한 셈이지만 사랑과 충실함으로 그렇게 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하느님께서도 (이처럼) 값을 받지 않고 무상으로 여벌의 작업을 수행하시는 하느님이시죠. 그분의 신실하심은 풍요로움과 무상의 충실함이니까요. 마치 아들이 돌아오는지를 보기 위해 하루에도 몇 번이나 테라스로 오르내리면서도 결코 피곤해하지 않는 아버지처럼 말입니다. 네, 그는 잔치를 열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걸요. (그러므로) 하느님의 신실하심은 잔치이자 기쁨입니다. 우리에게도 체험시켜 주시고자 하는 오늘 독서의 불구자가 느꼈던 바로 그 기쁨으로서의, 그가 성전 안으로 들어가 걷고 뛰며 하느님을 찬미하면서 가졌던 그 기쁨 말입니다. 이에, 하느님의 신실하심이란 잔치, 그것도 자유롭고 거침없는 잔치입니다. 아울러 이것은 우리 모두를 위한 잔치죠.
(한데 다른 한 편) 하느님의 신실하심은 끈기 있는 신실함이기도 합니다. 그분께서는 당신 백성에게 인내심을 가지고 그들의 말을 들어주고 그들을 인도해주며 차근차근 설명해주시니까요. 더불어 오늘 복음에서 예루살렘을 떠나 먼 곳으로 떠나던 두 제자에게 해주셨듯이 마음을 뜨겁게 만들어 주십니다. 네, 그들은 다시 집으로 돌아갈 정도로 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 이에 하느님의 신실하심이란, 우리가 비록 대화 속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당신을 거듭 부인했었던 베드로를 (기어코) 찾으신 관대한 하느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네, 우리는 단지 주님께서는 부활하셨으며 시몬에게 나타나셨다는 것만을 알 뿐입니다. 그 사이 대화 가운데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우리는 모르는 거죠. 하지만 여기에서 우리는 (적어도) 베드로를 찾은 것이 하느님의 신실함이라는 것은 압니다.
(실상) 하느님의 신실하심이 언제나 우리에 앞서시며, 우리의 충직함이란 늘 우리에 앞선 이 신실하심에 대한 응답일 뿐이니까요. 네,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우리보다 앞서십니다. 마치 봄에 제일 먼저 피는 아몬드 나무의 꽃처럼 말이죠. 하여 우리가 충직하다는 것은 이러한 (하느님의) 신실하심을 찬양한다는 것이며, 이러한 신실하심에 대한 일종의 응답일 따름입니다.
-성찬례 후 영적친교로의 초대-
영성체에 참여할 수 없는 분들은 이제 영적친교로나마 하나를 이룹시다.
나의 예수님. 저는 제대 위의 지극히 거룩한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시는 당신을 믿나이다. 저는 모든 것을 넘어 당신을 사랑하오며, 제 영혼 안에 당신 말고 바라는 것은 없나이다. 지금은 (비록) 당신을 성체로 모시지 못하기에, 당신께서 영적으로나마 제 마음에 임하시길 비오니, (허면) 이미 임하셨던 바와 같이 당신을 껴안으며 저의 모든 것을 당신과 하나 되게 하리이다. 부디, 당신과 저를 분리시키는 그 무엇도 허락치 마소서.
[성모찬송: Regina caeli]
Regina caeli, laetare, alleluia 하늘의 모후님, 기뻐하소서. 알렐루야 Quia quem meruisti portare. alleluia 태중에 모시던 아드님께서, 알렐루야 Resurrexit, sicut dixit, alleluia 말씀하신 대로 부활하셨나이다. 알렐루야 Ora pro nobis Deum, alleluia 저희를 위하여 하느님께 빌어주소서. 알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