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둘째주 주님 부활 대축일 그제야 무덤에 먼저 다다른 다른 제자도 들어갔다. 그리고 보고 믿었다.(요한 20.1-9)
사막의 무덤에서 본 것 (김주현 신부. 부산교구 문현성당 주임)
아버지와 아들이 사막을 여행 하다가 길을 잃었다. 사막은 불덩어리같이 뜨거웠고 갈 길은 멀었다. 뜨거운 햇빛과 목마름을 견디지 못한 아들이 아버지에게 말했다. `아버지. 더는 못가겠어요. 목이 마르고 지쳐서 죽을 것 같아요`
그러자 아버지는 아들을 격려했다. 얘야. 그렇지만 끝까지 가 보아야 하지 않겠니? 얼마 안가서 사람이 사는 마을을 발견할수 있을 거야.. 아버지는 아들을 다독거렸지만 아들은 이미 절망에 빠져있었다.
그러다가 두 사람은 무덤 하나를 발견했다. 이를 본 아들은 놀라서 말했다. 보세요. 아버지! 저 사람도 우리처럼 결국 지쳐서 죽고 말았어요... 아들은 너무 낙심해 고개를 떨궜다. 이제 아들에게는 아무런 힘도 의욕도 없어 보였다.
하지만 아버지는 아들 어깨에 손을 얹으며 조용히 말했다. 아니란다. 무덤이 여기에 있따는 것은 곧 희망이 있다는 말이다. 여기서 멀지 않은 곳에 마을이 있을 거야. 사람이 없는 곳에는 무덤도 없으니까.
과연 두 사람은 가까운 곳에서 마을을 발견했고. 여행을 계속할 수 있었다. 무덤을 보고 아들은 절망에 빠져 죽음을 보았지만. 아버지는 근처에 마을이 있을 거라는 희망을 보았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고난과 십자가. 죽음을 보고 절망하는 아들의 모습이 아니라. 아버지처럼 그 안에 숨어 있는 희망의 빛을 찾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그 희망의 빛 속에서 주님 부활을 보려고 한다.
지난해 말 중국 우한에서 시작된 코로나 19는 우리에게 많은 시련을 주고 있다. 알베르 카뮈의 소설(페스트)에서 아프리카 알제리의 도시 오랑은 페스트의 창궐로 폐쇄되고 수많은 사람이 희생된다. 급기야 죄 없는 어리 소년까지 희생되는 장면은 중국의 현실을 보는 듯하다.
이런 암흑과 절망 속에서 소설의 주인공인 의사 리외는 절망을. 예수회 신부 파늘루는 하느님의 은총을 보려고 한다. 엄청난 시련을 이겨낸 오랑 시민들은 죽음을 상징하는 페스트는 늘 우리 곁에 있으며 그 안에서 주님의 은총을 깨달으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되었다.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님의 비어있는 무덤을 보고 마리아 막달레나와 제자 베드로는 절망을 보았지만. 무덤에 먼저 다다른 다른 제자는 부활..이라는 희망을 보았다.
절망처럼 보이는 세상의 어둠속에서도 희망의 빛을 보려고 노력할 때 우리 안에 부활의 삶이 시작되지 않을까.
그들이 예수님을 나무에 매달아 죽였지만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사흘 만에 일으키시어 사람들에게 나타나게 하셨다.
(가톨릭 다이제스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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