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합/오늘의 강론

2015년 6월 27일 연중 제12주간 토요일

수성구 2015. 6. 27. 11:13

 

2015년 6월 27일 연중 제12주간 토요일

제1독서 창세 18,1-15

그 무렵 1 주님께서는 마므레의 참나무들 곁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다. 아브라함은 한창 더운 대낮에 천막 어귀에 앉아 있었다. 2 그가 눈을 들어 보니 자기 앞에 세 사람이 서 있었다. 그는 그들을 보자 천막 어귀에서 달려 나가 그들을 맞으면서 땅에 엎드려 3 말하였다.
“나리, 제가 나리 눈에 든다면, 부디 이 종을 그냥 지나치지 마십시오. 4 물을 조금 가져오게 하시어 발을 씻으시고, 이 나무 아래에서 쉬십시오. 5 제가 빵도 조금 가져오겠습니다. 이렇게 이 종의 곁을 지나게 되셨으니, 원기를 돋우신 다음에 길을 떠나십시오.”
그들이 “말씀하신 대로 그렇게 해 주십시오.” 하고 대답하였다.
6 아브라함은 급히 천막으로 들어가 사라에게 말하였다. “빨리 고운 밀가루 세 스아를 가져다 반죽하여 빵을 구우시오.” 7 그러고서 아브라함이 소 떼가 있는 데로 달려가 살이 부드럽고 좋은 송아지 한 마리를 끌어다가 하인에게 주니, 그가 그것을 서둘러 잡아 요리하였다. 8 아브라함은 엉긴 젖과 우유와 요리한 송아지 고기를 가져다 그들 앞에 차려 놓았다. 그들이 먹는 동안 그는 나무 아래에 서서 그들을 시중들었다.
9 그들이 아브라함에게 “댁의 부인 사라는 어디에 있습니까?” 하고 물으니, 그가 “천막에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10 그러자 그분께서 말씀하셨다. “내년 이때에 내가 반드시 너에게 돌아올 터인데, 그때에는 너의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을 것이다.”
사라는 아브라함의 등 뒤 천막 어귀에서 이 말을 듣고 있었다. 11 아브라함과 사라는 이미 나이 많은 노인들로서, 사라는 여인들에게 있는 일조차 그쳐 있었다. 12 그래서 사라는 속으로 웃으면서 말하였다. ‘이렇게 늙어 버린 나에게 무슨 육정이 일어나랴? 내 주인도 이미 늙은 몸인데.’
13 그러자 주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사라는 웃으면서, ‘내가 이미 늙었는데, 정말로 아이를 낳을 수 있으랴?’ 하느냐? 14 너무 어려워 주님이 못 할 일이라도 있다는 말이냐? 내가 내년 이맘때에 너에게 돌아올 터인데, 그때에는 사라에게 아들이 있을 것이다.”
15 사라가 두려운 나머지 “저는 웃지 않았습니다.” 하면서 부인하자, 그분께서 말씀하셨다. “아니다. 너는 웃었다.”


복음 마태 8,5-17

5 예수님께서 카파르나움에 들어가셨을 때에 한 백인대장이 다가와 도움을 청하였다. 6 그가 이렇게 말하였다. “주님, 제 종이 중풍으로 집에 드러누워 있는데 몹시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7 예수님께서 “내가 가서 그를 고쳐 주마.” 하시자, 8 백인대장이 대답하였다.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 9 사실 저는 상관 밑에 있는 사람입니다만 제 밑으로도 군사들이 있어서, 이 사람에게 가라 하면 가고 저 사람에게 오라 하면 옵니다. 또 제 노예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합니다.”
10 이 말을 들으시고 예수님께서는 감탄하시며 당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이스라엘의 그 누구에게서도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
11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사람이 동쪽과 서쪽에서 모여 와, 하늘 나라에서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 함께 잔칫상에 자리 잡을 것이다. 12 그러나 하느님 나라의 상속자들은 바깥 어둠 속으로 쫓겨나,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13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백인대장에게 말씀하셨다. “가거라. 네가 믿은 대로 될 것이다.” 바로 그 시간에 종이 나았다.
14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집으로 가셨을 때, 그의 장모가 열병으로 드러누워 있는 것을 보셨다. 15 예수님께서 당신 손을 그 부인의 손에 대시니 열이 가셨다. 그래서 부인은 일어나 그분의 시중을 들었다.
16 저녁이 되자 사람들이 마귀 들린 이들을 예수님께 많이 데리고 왔다. 예수님께서는 말씀으로 악령들을 쫓아내시고, 앓는 사람들을 모두 고쳐 주셨다. 17 이사야 예언자를 통하여 “그는 우리의 병고를 떠맡고 우리의 질병을 짊어졌다.”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



12일간의 성지순례를 마치고 무사히 복귀했습니다. 여러분들의 기도와 염려 덕분에 참으로 좋은 시간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이제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서 새벽을 열며 묵상 글을 다시 시작합니다. 물론 시차 적응이 되지 않아서 조금 일찍 올리지만, 조만간 다시 정상적으로 되돌아 오겠지요? 그럼 오늘의 묵상 글 시작합니다.

어느 마을에 부자가 되는 것이 소원인 농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자신이 운영하는 농장으로는 도저히 부자가 될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아무리 애써도 소득이 별로 나오지 않았거든요. 그래서 싼값에 농장을 팔아치우고 가족을 끌고 새로운 땅을 찾아 길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그런 땅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대신 길 위를 떠도는 동안 가족들은 하나 둘씩 목숨을 잃고 혼자 남게 되었지요. 절망에 빠진 그는 거지가 되어 유랑하다가 쓸쓸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한편 그에게 농장을 사들인 다른 농부는 자신의 땅을 목숨처럼 소중하게 여기고 온 정성을 바쳤습니다. 소출이 보잘 것 없어도 만족하면서, 이렇게 열심히 일하면 언젠가는 큰 결실을 맺으리라는 희망을 잃지 않았지요. 그러다가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글쎄 지난번 농장주가 척박한 땅이라고 버려두었던 뒷마당을 개간하던 중에 엄청난 다이아몬드 광산이 발견된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계몽문학 시대의 러셀 콘웰의 ‘다이아몬드 이야기’의 내용입니다. 부자가 되기를 원했던 농부는 자신의 농장에 대한 믿음이 없었지요. 반대로 농장을 새로 사들은 농부는 믿음뿐만이 아니라 희망을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결국 어떻게 되었습니까? 포기하지 않고 노력한 결과가 자신의 믿음이 올바르다는 것을 그대로 증명했습니다.

우리의 신앙도 이렇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주님께 대한 믿음이 없는 사람은 이것저것 다른 것에만 신경을 씁니다. 지금의 나를 행복으로 이끌어 주는 것은 주님이 아니라, 세상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런 유혹에서 벗어나 진심으로 주님께 집중했을 때, 또한 주님께 대한 희망을 잃지 않을 때 ‘다이아몬드 광산’처럼 엄청난 선물을 받을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백인대장이 도움을 청합니다. 중풍으로 힘들어하는 자신의 종을 고쳐달라는 것이지요. 만약 이 백인대장의 입장이라면 예수님께서 어떻게 하셔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종이 누워 있는 집으로 함께 가주시던가 아니면 종을 예수님 앞으로 데려올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는 뜻밖의 모습을 보입니다. 굳이 당신의 집에 가시지 않아도 된다면서 예수님의 한 말씀만으로 충분히 종이 나을 것이라는 믿음을 보입니다.

눈으로 보는 것만을 믿으려는 우리일 때가 많습니다. 그러다보니 주님께 대한 믿음을 간직하지 못할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그러나 백인대장은 예수님의 존재 그것만으로도 또 예수님의 한 말씀만으로도 믿을 수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네가 믿은 대로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면서 그가 원하는 바를 얻을 수 있게 하십니다.

믿음을 갖기가 참 어렵지요. 그 순간 복음에 등장하는 백인대장의 모습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따라 주님의 존재 그 자체로 또 말씀 한 마디로 다 이루어질 수 있음을 굳게 믿어야 합니다. 주님 안에서 엄청난 ‘다이아몬드 광산’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믿은 대로 분명히 됩니다.

스승이 제자들에게 말했다. 일생 동안 너를 저버리지 않을 유일한 사람은 바로 너다. 네 질문의 답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 것도 너다. 네 문제의 해결책이 무엇인지 상상할 수 있는 것도 너다(앤소니 드 멜로).


로마에 유학 중인 인천교구 사제들과 함께.


똑같은 이유인데 다른 시선인 우리들

언젠가 어떤 신부님과 함께 해외여행을 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여행지에서 본 신부님의 모습이 평소와 많이 다른 것입니다. 즉, 평상시에 단정하고 깔끔하게 차려입는 모습과는 달리 너무 후줄근한 옷차림을 해서 요즘 젊은이들의 말로 없어 보이는 모습이었기 때문이었지요. 그래서 제가 물었습니다.

“아니, 평소에 이렇게 옷을 입고 다니지 않잖아요.”

그러자 이렇게 말씀하세요.

“어차피 나를 알아보는 사람도 없는 곳인데 어때? 대충 입는 거지. 입다가 빨 때가 되면 그냥 버릴 거야. 한국에서는 입지 않을 테니까.”

해외성지순례를 갔을 때도 기억납니다. 제가 잘 아는 자매님인데 평상시에는 점잖고 화려하지 않은 색깔의 옷을 입으시는데, 해외에 나간다고 그런지 자매님의 모습에서 보기 힘든 화려한 옷을 입고 오신 것입니다. 제가 물었습니다.

“아니, 평소에 이런 옷을 입지 않으시잖아요.”

이에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어차피 저를 알아보는 사람도 없는 곳인데 어때요? 따라서 평소에 입을 수 없는 옷들을 챙겨서 입어야지요. 한국에서는 입기 힘드니까요.”

이 두 분이 비슷하지 않습니까? 알아보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어떤 옷을 입어도 상관없다는 생각은 똑같습니다. 그런데 한 분은 버려도 될 옷을 그리고 다른 분은 입어보고 싶었으나 입기 힘든 옷을 선택하신 것이지요.

똑같은 이유인데 다름이 분명합니다. 이분들의 모습을 기억하면서, 세상 삶이 다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습니다. 똑같은 이유이지만 그 이유를 바라보는 시선을 다를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많은 이들이 다른 시선 때문에 다투고 단죄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다른 시선을 인정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이는 사람마다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로마에는 베드로 대성당보다 높이 세울 수 있는 건물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사진은 어디서 찍었을까요?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