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이들에 대한 우선적 선택 (양치기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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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 시대 당시 불행하게도 장애를
하느님의 벌로 보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참으로 안타깝고 기가 막힌 현실이었습니다.
안 그래도 장애로 인해 힘겹고 고달픈 삶을 살아가고 있었는데,
또 다른 낙인까지 찍혔던 것입니다.
그래서 당시 팔다리가 온전치 못한 사람들은
쿰란 공동체에 가입할 수가 없었습니다.
더구나 성전의 희생제사 때 제물로 바쳐 지는
동물의 머리에 손을 얹는 일도 금지되었으며
공적인 성전 예배에 참여할 수도 없었습니다.
다행히도 정말이지 이런 말도 안 되는 기가 막힌 오류를
예수님께서 완전히 뒤집습니다. 눈앞에 펼쳐지는 현실에만 혈안이 되어 있는
세상 사람들에게 눈을 들어 또 다른 세상을 보라고 요청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은 비록 지상의 잔치에 참여하고 계시지만
머지않아 참여하게 될 천상잔치를 생각하고 계십니다.
지금은 비록 몸은 지상의 도읍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지만
마음은 이미 천상예루살렘을 향하고 계십니다.
지금 떵떵거리는 권세가들, 부자들, 지도자들이 누리고 있는 지상의 권세는
하느님 나라에서 급격히 쇠락할 것이며
지금 이 세상에서 고통 받고 있는 장애우들의 약함은
하느님의 능력에 힘입어 권능으로 바뀔 것입니다.
지상에서 천상으로 순례길을 걷고 있는 오늘 우리에게 주어지는
중요한 과제가 한 가지 있습니다. 열심히 지상생활을 해나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자주 눈을 들어 또 다른 세상을 바라보고 준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권고말씀에 따라 보답을 바라지 않는 사랑을 실천할 일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알아주던 알아주지 않던 언젠가 하느님께서 주실
큰 상급만 생각하며 꾸준히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식탁에, 성교회의 만찬에 보다 적극적으로
가난하고 고통 받는 사람들을 초대할 일입니다.
예수님의 가난한 이들에 대한 각별한 사랑과 우선권은
중요한 전통으로 흘러내려오고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코린토 교회 신자들의 집회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아
노골적으로 꾸짖었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만찬에 모여올 때
저마다 준비해온 음식을 공동체에 내놓지도 않고 먼저 먹어치우곤 했습니다.
그러다보니 가난한 사람들이 쫄쫄 굶고 돌아갔습니다.
분노한 바오로 사도가 이렇게 꾸짖었습니다.
“여러분은 먹고 마실 집이 없다는 말입니까?
아니면, 하느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가진 것 없는 이들을 부끄럽게 하려는 것입니까?”(1 코린토 11장 22절)
이러한 전통적 교회의 가르침은 제2차바티칸공의회에서
다시 한 번 강조됩니다. 가난한 이들에 대한 우선적 선택!
사심 없는 마음으로, 쥐도 새도 아무도 모르게
꾸준히 가난한 이웃들을 위해 선행을 베푸는 사람들,
그러면서 눈을 들어 천상예루살렘을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건네질
하느님의 상급은 클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에서 하느님 아버지와의 영원한친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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