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합/시와 좋은 글

이기적인 기도

수성구 2022. 9. 8. 05:19

이기적인 기도

(이해인 수녀)

 

하느님

오늘은 몸이 많이 아프니

기도가 잘 안 되지만

되는대로 말씀드려 봅니다.

 

 

앞으로의 남은 날들이

어느 날부턴가 누군가에게

짐이 될 거라 생각하면

종일토록 우울합니다.

 

 

살아 있는 동안은

스스로 사물을 분간하며

내 손으로 밥을 먹고

내 발로 걸어 다니는 것을

꼭 허락해 주세요

 

 

누가 무얼 물으면 답해주고

웃으면 같이 웃어주고

온전히는 아니어도

적당히 대화를 나눌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병명 없는 통증도 순하게

받아 안을 테니

오랜 세월 길들여 온

일상의 질서가

한꺼번에 무너지지 않을 만큼

딱 그만큼의 건강과 자유는

허락해 주시기를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사랑하는 하느님

 

 

그동안 내내

남을 위해서만 기도했으니

오늘은 좀 이기적인 기도를

바쳐도 되는 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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