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동글

헐렁한 우정

수성구 2022. 2. 2. 05:11

헐렁한 우정

평소 나는 쾌활하고 말이 많다.
처음 만나는 사람이 있으면 친해지고 싶어
쉽게 말을 걸고 선뜻 속내를 밝히기도 한다.
정적은 견디기가 어렵다.
요즘 유행하는 성격 유형 검사로 따지자면
'재기 발랄한 활동가'인 ENFP(이엔에프피)에 속한다.

 
다큐멘터리 감독인 내게 이러한 성격은
직업적으로 큰 장점이 된다. 다만
많은 사람과 쉽사리 가까워지는 대신,
빠르게 상처를 주거나 받는다.
금방 사람에게 빠지고, 또 금방 빠져나오는
양방향 '금사빠'인 셈이다.

 
나는 작년부터 '상(上)-여자의 착지술'
프로젝트 팀의 기획자로 활동하고 있다.
'상(上)-여자의 착지술'은 예술 매체를 통해
성폭력 피해 생존자의 일상 회복을 지원하는
프로젝트다. 피해 당사자와 문화 예술계 내에서
연대 활동을 해 온 예술인들이 기획자로 나섰다.
  
처음 모임을 가진 날,
함께 읽은 약속에 이런 문구가 적혀 있었다.

"친해지는 거 급하지 않아요. 천천히 친해지기."

당황스러워 동공이 흔들렸다.
다음 문구는 이러했다.

"나의 공간, 상대방의 공간을 존중하고 지키기."

이번엔 수긍할 수 있었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이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범위가 다르다.
어떤 사람은 상대방이 열 발자국 떨어져 있어야 마음이 편하고,
어떤 사람은 상대방이 한 발자국만 떨어져 있어도 상관없어 한다.
타인을 허용하는 거리감이 서로 다른 것이다.

남들로부터 열 발자국 떨어져 있어야하는 사람에게는
그 열 발자국이 가장 친밀한 거리일 수 있다.
내가 한 발자국 떨어져 있는 것이 괜찮다고 해서
그 사람의 코앞까지 다가간다면, 자칫
상대방의 공간을 침범하는 일이 될 수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서로 속도를 늦추고
조심스럽게, 천천히 다가가야 한다.

 
그러고 보니 나는 친해지고 싶은 마음에
매번 전속력을 다해 상대방에게 다가갔다.
상대방의 속도와 상대방이 허용하는 공간은
고려하지 않은 채 말이다.

 
상대에게 급하게 다가가면
관계도 체할 수 있다는 것을
이번 프로젝트 기획자들과 만나며 알았다.

서로의 공간을 존중하기에
조금은 떨어져 있지만
느슨하게 연결될 수 있다는 것도,

아주 가까이 있지 않더라도, 힘들고 지칠 때
서로 도움을 나눌 수 있는 거리에
서 있을 수 있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우리는 이 다정한 거리감을
'헐렁한 우정'
이라 부르기로 했다.

 
 
이민지 | 다큐멘터리 감독

아마도 살아가면서 우리가 들을 수 있는  
가장 놀라운 찬사는 "내 옆에는 네가 있어."
 라는 말이 아닐까요. - 김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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