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옥도리
마태오 복음 5장 25~26절에는
"너를 고소하는 자와 함께
법정으로 가는 도중에 얼른 타협하여라.
그러지 않으면 고소한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넘기고
재판관은 너를 형리에게 넘겨,
네가 감옥에 갇힐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네가 마지막 한 닢까지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는
말씀이 있다.
마태오 복음 12장 32절에는
"사람의 아들을 거슬러 말하는 자는
용서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거슬러 말하는 자는
현세에서도 내세에서도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는 말씀이 있는데,
여기서 내세에서 용서받을 수 있는
죄와 장소(연옥의 존재)가 있음을
간접적으로 계시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루카 복음 16장 19~31절의 부자와
라자로 이야기에서의 부자가 있는 장소,
테살로니카 전서 4장 16절의
"먼저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이들이 다시 살아나고" 라는 구절,
필리피서 2장 10절의 "땅 아래에 있는
자들이 다 무릎을 꿇고"라는 구절,
묵시록 6장 11절의 "자기들처럼
죽임을 당할 동료 종들과
형제들의 수가 찰 때까지 조금 더 쉬고
있으라는 분부를 받았습니다"는
구절들이 연옥을 암시하는 말씀들이다.
위에 열거된 구약의 성경들은
원문인 히브리어 원본이 없고,
희랍어로 쓰여진 말씀이다.
그래서 개신교는 정경(Canon)으로
분류하지 않고 외경으로 취급하며,
우리 가톨릭만이 제2정경(7권)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말씀들이다.
그리고 오상의 성 비오 사제
이야기에서 뿐만 아니라
여러 성인 성녀들의 묵시속에서
연옥의 실재는 너무나 잘 드러나 있다.
마르틴 루터가 종교분렬을 일으킨
1517년 전까지 가톨릭에서
믿어온 교리가 갑자기 뒤집어져서
물구나무를 서는 법은 없다.
개신교의 이신득의(以信得義;
믿음으로써 의인으로 인정받는다)나
칭의(稱義; 실제로 의롭지 않은데
의롭다고 불려지는 것)교리로
믿기만 하면 천국 간다는 교리는
겉으로 보면
그들의 믿음이 대단한 것으로
비쳐지게 하지만, 어쩌면
너무나 영적 오만의 소치일 수 있다.
벌레만도 못한 죄인이 감히
무한히 완전하시고 거룩함 자체이시고
절대 선, 절대 진리 자체이신
하느님 대전에
스스로 구원을 선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 십자가 우편의 강도
(Dismas라는 이름으로 불려짐)처럼
죄를 지은 인간이 하느님편에 서서
하느님 중심으로 뉘우치는
상등통회가 현실적으로 쉽지가 않다.
보통 사람들은 자신이 저지른
죄의 벌이 무섭고 두려워서
자기 중심으로 뉘우치지 자신의 죄 때문에
아파하시는 하느님의 마음을 생각해서
하느님 중심으로
뉘우치는 인간은 드물기 때문이다.
마치 자식이 부모의 마음을
알아 듣기가 쉽지 않고
자신이 혼인하여 자식을 양육하면서
자신의 부모의 마음을 알아듣는 것처럼
말이다.
어떻든 우리 불완전하고 나약하고
더러운 인간들은
거룩하시고 존엄하시며 무한히
완전하신 하느님 대전에 나아가려면
정화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데,
이러한 정화의 장소인 연옥을 주신 것에
대해 감사드려야 한다.
개신교에서 자신들이
예수님을 믿기만 믿으면 천당간다고
아무리 자기식으로 강력하게 주장하여도,
고해성사 제도가 없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죄사함의 용서를
받을 수 있는 길이 없다.
그들이 유일하게 죄사함의 용서를
받을 수 있는 길은 하느님 중심으로
뉘우치는 상등통회뿐이다.
그래서 자신이 죄짓고 자신이 눈물뿌려
스스로 이 정도 했으면
용서받았다고 생각하는 것이
개신교의 믿음 생활인데,
도대체 그렇게 해서 용서받았다는
근거가 어디 있으며,
또 그처럼 스스로 용서할 수 있는 권한은
누가 주었으며,
어디에서 그런 권한이 왔는지를
밝혀야만 하는 것이다.
개신교는 아무리
자신의 생각이 옳다하여도
자신의 믿음과는 달리 죽으면 대다수가
이미 존재하는 연옥을 거쳐야만 된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것이 진리이고, 그것을 인정하는 것이
겸손한 믿음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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