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분별
사람마다 왜 꿈과 소망과 비전이
없으며, 좀 더 잘해보겠다는
열의와 집착하는 것이 없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살아가면서 지금
자신이 하고 있는 것을 조금 떨어져서
객관적으로 볼 줄 알아야 합니다.
눈에 보이는 현상이 아니라
그 안의 본질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영분별에 있어서 <경험적 예언>처럼,
지금 떠오르는 생각이나 영감대로
한다면, 지금 하고 있는 삶의 태도와
자세를 갖고서 이 일을 계속한다면,
어떤 결실과 열매를 맺을 지를
미리 내다 보고, 좋은 것이 아니고
나쁘고 악한 결과가 예측될 때에는
과감하게 접고 내려 놓아야만
새로운 지평이 열리는 것입니다.
삶의 여정에서 과속이 붙은 것의
속도를 줄이고, '우선 멈춤', 'STOP'
간판에서 잠시 멈추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대로 계속 가야 할지?'
'방향을 틀어야 할지?'
'그만 두어야 할지?' '지금 몇 킬로,
몇 마일로 영원한 멸망을 향해 달리고
있는지?' '내가 지금 원수로 여기고
싸우는 상대가 누구인지?'
'결과적으로 내가 하느님을 대적하고
있지는 않는지?' 진정으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타성에 젖은 악습과 분별없는 무모한
대듦과 이성없는 감정적 대립과
적대감과 '자신의 탓','내 탓'은
내버려두고, 오롯이 '상대방 탓',
'네 탓'만 하는 삶의 태도는
결코 일의 해결과 악의 최소화를 위해
그리고 자신의 구원을 위해
좋지 않습니다.
더 나쁜 결과가 오기 전에 잘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계시하신 복음적 가치관은
악에 악으로, 본성에 본성으로가
아니며, 선과 사랑으로 악을
이기는 것입니다
(로마12,14.17.19~21).
박해자와 적대자를 위해 필요한
은혜를 빌어주고(마태5,44)
회개를 위해 기도를 바쳐주는 것입니다.
끝까지 예수님의 복음적 영생적
가치관을 받아들이지 않고, 끝까지
회개하지 않고 옹고집을 부리는 것은
성령을 거스르는 것이며,
결코 죽어서도 용서를 받지 못하는
우(愚)를 범하는 것입니다(마태3,29).
지금 자신은 누구의 도구로 쓰임받고
있으며, 자신의 본성적 성향과
이성의 그릇된 판단이 어떤 세력에 의해
이용당하고 있는지 보아야 합니다.
성령입니까?
자신의 본성입니까? 악령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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