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울 때도 지혜로워야!
6월 넷째주 연중 제13주일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
(마르 5.21-43)
도울 때도 지혜로워야!
(최재관 신부. 육군 전진1사단 성당 주임)
야이로의 딸과 하혈하는 여인의 이야기에서 우리는 예수의 능력을 믿고
그분께 다가가 기적을 체험하는 이들을 본다.
하지만 조금만 더 주의 깊게 복음을 본다면.
그 만남의 주도권자는 회장 야이로도. 하혈하는 여인도 아닌 예수임을 발견하게 된다.
회당장 야이로는 사회적 지위가 있는 인물이다.
일반인이라기보단 율법학자나 바리사이에 더 가깝다.
딸의 병고로 인한 절망으로 많은 이들이 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예수 앞에 엎드려 도움을 청한 그의 행동은 믿음의 증거였지만
누군가에게는 공분을 사는 위험한 일이기도 했다.
위험을 무릅쓴 그를 보고 예수께서는 치유를 넘어선 부활의 기적을 보여주시는데.
놀라운 점은 그 일을 알리지 말라고 거듭 분부하는 점이다.
이 당부는 기적을 받아들일 준비가 안된 군중을 위한 배려임과 동시에
부활의 기적을 증언함으로 핍박받을 수도 있었던 회당장 야이로와
그 가족에 대한 배려로 생각된다.
예수의 배려는 단지 야이로에게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집에 가던 도중 유연히 옷자락을 잡아 치유를 받은 여인과의 대화에서도
그 따뜻함이 나타난다.
재산을 탕진하며 수년간 병고에 시달렸던 여인에게 예수께서는
단지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그리고 병에서 벗어나 건강해져라...라는 말씀만 하시다.
절제된 이 짧은 만남은 여인을 위한 예수의 사랑이다.
당시 이스라엘에서 여성이 수년간 하혈을 한다는 것은
굉장히 치욕스러운 아픔이었다. 아이를 가지지 못하는 여인에 대한 핍박은
단지 몸의 아픔에서 그치지 않고 가족을 포함한 공동체에서의 단절을 의미했고.
저주나 천형처럼 취급되어 위로는 커녕 손가락질당할 수 밖에 없던 때였다.
수많은 군중이 보고 있는 중에 이뤄진 예수와 여인의 짧은 대화에서는
그 여인이 누구인지. 어떤 병을 앓고 있었는지에 관해서
일체의 단서를 제공하지 않는데. 그리고 믿음으로 구원되었다는 말을 통해
수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절망할 수밖에 없었던 여인의 마음까지도 함께 치유해주신다.
순식간에 이뤄진. 이 짧은 만남 자체가 예수의 배려였던 것이다.
어쩌면 아픈 곳에 손을 데어 치유하는 것이 아니라 옷자락을 통해
하혈의 아픔이 치유되었던 것조차도 그분의 지극한 배려였을지 모를 일이다.
오늘도 몸과 마음이 아픈 이들은 여전하다.
나도 세심한 배려를 통해 정말로 필요한 이들에게 필요한 도움을 주고 싶다.
병자와 빈자를 찾아 나선 예수와 수많은 성인들처럼 나도 그분들의 삶에
눈높이를 맞추어 도움을 주는 지혜가 솟아나기를 기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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