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생활에는 성실하고 진지한 자세가 요구된다
하느님 안에 숨은 생활 제2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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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생활에는 성실하고 진지한 자세가 요구된다
예수님은 자신의 생애를 온전히 우리에게 바친 성실하신 분이셨다.
우리를 위하여 활동하시고, 고통받으시고, 또 우리를 생각하지 않고
사신 적은 한 순간도 없으셨다.
그분은 하느님의 영광과 우리 구원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으셨다.
그리고 지금은 아버지 앞에서 우리를 변호해 주고 계신다(요한 1서 2:1).
따라서 우리는 그분께 대단히 성실해야 한다.
우리에게 불충실하고, 무익하고, 위험스럽기까지한 피조물들에게
우리 영혼과 생각 그리고 우리의 사랑을 가질 권리를 주지 말아야 한다.
우리의 영혼과 생각들, 우리의 사랑은 오로지
그리스도에게만 속하고 그분의 것이어야 한다.
우리 안에 있는 모든 것, 즉 우리의 이성과 마음, 우리의 내외적 능력은
하느님을 위해서만 존재하고 그분의 뜻에 따라
고통을 참아 받을 때 진정한 가치가 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하시고 고통받으신 것처럼,
우리도 그분을 닮은 완전한 그리스도인이 되려고 하지만,
이 세상과 함께 거의가 고통을 받으려 하지 않는다.
우리는 예수님과 더불어 가난해지려 하지만, 실제로는 부유함을 보존하고자 한다.
우리는 멸시당하고 싶어하지만 실제로는 영광 중에 있고자 한다.
우리는 고통받고자 하지만 모든 안락함을 누리고 싶어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다.
은총은 이런 영혼 가운데 오랫동안 머물러 있을 수 없으므로
우리는 이러한 미지근한 태도를 넘어서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영혼 안에 당신 모습을 드러내시도록
은총이 우리 안에서 활동하기를 원한다면, 영혼은 큰 자제심을 가져야 한다.
이때 우리 안에서 활동하는 은총은 자기의 주관을 관철시키고
이웃의 권한을 침범하는 폭군과도 흡사하게 된다.
이웃들이 한탄하고 고함을 지르는데도 폭군은 아랑곳없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의 잔인한 작업을 계속할 것이다.
때때로 그는 이웃에게 한두 가지의 희망을 주어 위로도 하지만,
어느 때는 그들을 협박하고, 자주 그들을 모욕한다.
만일 은총이 한 영혼 안에서 통치하기 시작하면 이와 마찬가지이다.
본성은 고함지르고, 육신은 불평하며, 오관은 한탄하고,
의지는 반항하지만 은총은 아무 것도 들어주지 않고,
어떤 대답도 하지 않으며 본성을 희생시켜가며, 그의 일을 계속한다.
때때로 은총은 영혼에게 천국에서 큰 상급을 받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며 본성을 극복시키는 일을 계속한다.
세상에서 부유한 사람들은 좋은 음식만으로 만족하지 않는다.
그들은 호화롭고 화려하게 살기 위해 재산을 넘치도록 긁어모은다.
이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은 은총의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서
마지 못해 자신을 포기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는다.
그들은 온전한 자유의지로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을 닮으려고
자아포기를 철저히 실행하면서 이 세상에서 예수님처럼 고통으로
자신의 삶을 장식하고 싶어한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당신 때문에
자신을 희생하는 영혼들을 매우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많은 이들은 특별한 은총으로 인해 완덕에로 불리움을 받았으나
소수의 사람들만 그곳에 도달한다. 그것은 용기가 없고 성실하지 못한 탓이다.
사람들은 기도와 극기의 생활을 진지하게 선택하지만
육신에 대한 소심함과 애정 때문에 곧장 중지해 버리고 만다.
사람들은 자신을 너무나 아끼며, 건강이 손상될까 두려워한다.
우리가 평범한 생활을 버리면 다른 이들이 어떻게 생각할지
염려하여 귀를 기울이면서 주저하게 된다.
우리는 본성과 친구, 그리고 우리의 육적 애착을 칭찬해 주는 사람들의
귀띔하는 말에 너무 많이 귀를 기울인다.
내 영혼아, 이렇게 해서는 하느님께로 향하는 길로 나아가지 못한다.
너의 소명이 무엇인지 아는 것으로 충분하다.
세상 것에는 장님이 되어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보지 말아라!
그분이 원하시는 것만을 행하고, 그밖의 모든 것들을 업신여겨라!
네 자신을 온전히 그분의 은총의 인도하심에 맡기고 성실히 따르라!
어떠한 희생을 감수하더라도…
<오, 예수님! 당신의 길은 얼마나 아름답고 좋은지요!
당신이 사신 것처럼 이 세상에서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오, 예수님! 나는 당신을 따르고 싶습니다.
비록 재산과 영예와 건강과 생명까지 잃어버린다 할지라도.
온 세상을 얻는 것보다 당신의 계명에 성실하는 것이 훨씬 더 좋습니다(마태오 16:26 참조).
나는 당신의 은총에 장애물을 놓지 않겠으며,
당신 원하는 대로 나를 처분하고 내 안에 당신 자리를 주렵니다.>
무의미한 생활로 30년을 보내는 것보다 그리스도적 완덕 생활의 1년이 더 낫다.
왜 우리는 이다지도 자신을 아끼는지?
무엇 때문에 우리는 정력과 건강을 아끼는지?
내영혼아! 완덕의 길을 향해 성실하게 나아가는 데 한 걸음도 물러서지 말아라!
우리가 얼마나 사소한 일로 허송세월 보내는지 생각해보면, 나는 부끄러워진다.
가련한 피조물의 욕구에 따르기 위해 하느님
은총의 느낌을 저버리는 것은 불충실한 일이다.
온갖 은총을 저버리는 행위에 대해 하느님께서는 그를 벌하시지 않을까?
우리는 사랑 자체이신 그분을 사랑하자!
세상과 인간의 허영심과 쾌락을 피하는 바로 그때 우리는
영성생활의 첫걸음을 내딛는 것이다.
수치와 멸시를 포옹할 때, 우리는 더 앞으로 나아가게 된다.
십자가의 어리석음 안에 우리 자신을 숨기면 우리는 우리의 작은 배로
육지를 떠나서 영원한 항구인 최고의 선이시여,
거룩한 사랑 자체이신 그분의 품 속에 안기게 될 것이다.
예수께서 십자가와 멸시와 가난으로 우리를 앞서가시며,
나를 따르라고 사랑스럽게 초대하시는 것을 우리는 바라만 볼 수 있겠는가?
세상은 빛이 없기 때문에 용서해 줄 수 있지만,
우리는 어떤 변명으로 용서받을 수 있을까?
바보로, 그리고 모든 인간 가운데 가장 멸시받을 자로 간주되는 것은
나에게 큰 은총이 되어야 한다.
또 내가 하느님께 성실하고 모든 은총의 이끄심에
따르려고 하기 때문에 생명을 잃어버리는 것마저도 하느님께 충실히
살다 죽는 것보다 이 세상에서 무슨 더 좋은 일을 할 수 있겠는가?
네가 완전해지고 싶다면 하느님이 아닌 모든 것으로부터, 특히 네 자신을 끊어라!
네가 하느님을 만나고 싶다면 네 자신을 찾지 말고,
비록 그것이 영성생활에 도움이 되는 것 같더라도 결코 네 유익과
이로움에 시선을 두지 말고 하느님의 영광에만 목표를 두어라.
<나의 하느님! 이제부터 나는 온전히 당신의 것이 되고 싶습니다.
당신의 자비에 의지하여 심사숙고한 후,
완전하고 단호한 의지로 당신 소유이기를 원합니다.
당신은 나에게 은총의 달콤한 이끄심으로 이런 강한 충동을 주십니다.
오, 끝없이 아름다우신 자여!
나는 당신의 꾐에 이끌려(예레미야 20:7)
저항할 수가 없습니다.
나를 당신께 온전히 맡겨 드리며 나는 완전히 당신의 것이나이다.
당신 외에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으려고 이제와 영원히 모든 피조물과 결별하렵니다.
당신 외에 내가 하늘 나라에서 무엇을 소유할 것이며 땅에서 무엇을 추구하겠습니까?
내 영혼과 육신이 쇠하여지더라도 당신은 영원히
내 마음의 반석이시며 구원이시나이다.
나는 천국에서 당신 외에는 아무 것도 바라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땅에서 무엇을 또 바라겠습니까?>
“당신 아닌 누구가 하늘에서 날 위해 주오리까.
당신과 함께 있노라면, 즐거울 것 땅에는 없습나이다.”(시편 72: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