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합/주님의 향기

주소도 모른 채 선교지로

수성구 2021. 5. 28. 04:11

주소도 모른 채 선교지로

5월 다섯째주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었다

(마태 28.16-20)

 

주소도 모른 채 선교지로

(이미자 수녀. 아씨시의 프란치스코 전교 수녀회)

 

반쯤 뜬 눈으로 성호를 그으면서 새벽을 깨우고. 성호를 그으면서 하루를 마무리한다.

문득 나는 하루 중 얼마나 많은 대에 성호를 긋는가 생각하다가

94세 쥴리아나 수녀님이 떠올라 미소를 짓는다.

그 옛날 수녀님이 운전면허 시험을 치를 때 시험관이 차에 동승해

운전을 시작할 때 제일 먼저 해야 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즉시 성호를 긋는 것이라고 대답하자 시험관이 웃으며

그 다음 할 일을 물어 안전벨트를 맨다고 대답해 시험을 통과했다는 것이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성호를 긋는 것은 삼위일체의 신앙고백이다.

성부의 사랑을 받아들이며 성자의 은총 안에 살고 성령의 선물에 우리 마음을 여는 것이며.

우리의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을 삼위일체 하느님의 이름으로 행하겠다는 약속이다.

인간의 삶에서 세상 끝날까지 언제나 함께 있겠다 하신 예수의 말씀보다

더 완전하고 확실한 보장은 없으며 더 큰 위로도 없을 것이다.

 

 

60년 전 우리 수녀님들은 오로지 성부와 성령의 이름으로 주소도 제대로 모른 채

한 달 넘게 배를 타고 브라질 선교를 떠났다.

먼저 가 계셨던 꼰벤뚜알 프란치스코회 신부님들은 이태리신문을 읽고서야

수녀님들의 소식을 알고 마중 나갔다고 한다.

만약 신부님들이 신문을 늦게 봤거나 읽지 않았다면 어찌 되었을까 싶다.

 

 

그럼에도 수녀님들은 걱정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렇다! 선교를 떠난다는 것은 하나의 모험이 되어야 한다.

준비되지 않은 길. 없는 길을 찾아서 떠나는 것이고.

길을 가면서 새로운 길을 만들어 그 길 위에 하느님의 사랑을 펼쳐야 한다.

 

 

언젠가 잠비아에서 말라위로 떠난 적이 있다.

관구장 수녀는 공동체 원장이 연략했겠지. 원장수녀는 관구장이 연락했겠지 생각해

결국 아무도 공항에 나오지 않았다.

그 당시 내게는 휴대폰도 없었다. 누구에게 도움을 청하나 두리번거리던 중

마침 한 탄자니아 수녀를 만나 휴대폰을 빌려 연락하니 언제 오느냐고 묻는다.

아이고. 난 벌써 말라위에 도착했는데...

두 시간도 넘는 거리에다 아직 차량 준비도 안 되었다고 해서

탄자니아 수녀님을 따라 그 수녀님의 수도원까지 동행하게 되었다.

가는 도중 그야말로 아는 영어를 총동원해 엉터리로 말했는데 신기하게도

서로 알아듣고 웃을 수 있었다.

분명히 성령께서 우리 사이에 계셨던 것이다.

 

 

그렇게 도착한 수도원의 원장이 이태리 수녀여서 드디어 숨통이 트였다.

말이 통하는 사람을 만난 것이다.

나는 점심까지 얻어먹고 실컷 수다까지 떨다가 나를 데리러 온 수녀님들을 만나

우리 수도원으로 갔다. 선교지를 방문할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언제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 무조건 하느님께 맡기는 상책이란 생각이 들었다.

 

 

말라위를 떠날 때는 도착 때보다 더 심란했다.

수녀님들은 아직 자동차가 없었고 나를 데리러 왔던 차는 정비소에 가 있었던 것이다.

결국 수녀님들이 일하는 병원 앰뷸런스를 타고 공항으로 갔는데

너무나 친절한 운전기사 아저씨가 배려해주느라 공항 입구 바로 앞에 차를 세워주었다.

앰뷸런스에서 누가 내리나 사람들의 호기심 어린 시선이 몰리는게 아닌가.

동양 수녀가 말짱한 두 발로 차에서 내리면 뭐라고 할까?

이럴 줄 알았으면 목발이라도 한 개 준비할 것....

좀 멀찍이 세워줄 것이지! 그 순간 고마웠던 기사가 살짝 원망스러워졌다.

곤혹스럽지만 에라 모르겠다. 눈 딱 감고 앞으로 전진했다.

 

 

주님을 따르는 길에 이렇게 생각지 못한 일을 수없이 만난다.

하지만 걱정하지는 않는다. 주님께서 늘 함께하고 계심을 알기 때문이다.

삼위이신 그분께서는 내가 돌보아 줄 테니 걱정 말고 떠나라...고

오늘도 우리를 재촉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