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안에 머무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무릅니다”
[더 쉬운 사회교리 해설 - 세상의 빛]
110. 가치에 대한 성찰 - 올바른 정의란 무엇일까 (7) 형제애, 그리스도인의 정의(「간추린 사회교리」 3항)
“사랑 안에 머무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무릅니다”
그러자 하느님께서 요나에게 물으셨다. “아주까리 때문에 네가 화를 내는 것이 옳으냐?”
그가 “옳다 뿐입니까? 화가 나서 죽을 지경입니다.” 하고 대답하니,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는 네가 수고하지도 않고 키우지도 않았으며, 하룻밤 사이에 자랐다가 하룻밤 사이에 죽어 버린 이 아주까리를
그토록 동정하는구나! 그런데 하물며 오른쪽과 왼쪽을 가릴 줄도 모르는 사람이 십이만 명이나 있고,
또 수많은 짐승이 있는 이 커다란 성읍 니네베를 내가 어찌 동정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요나 4,9-11)
속 좁은 요나?
구약의 요나서는 모든 인간을 회개로 초대하시는 하느님의 자비를 전합니다. 인상적인 것은 히브리인 요나라는 사람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에게 니네베로 가서 사람들을 회개시키라고 하십니다.(1,2) 하지만 그는 거부하고 도망가며(1,3),
고래 뱃속에 들어가는 신세가 됩니다. 실제 역사와 차이가 있지만 니네베는 적국의 수도였습니다.
요나는 이것이 못마땅했습니다. 하느님께서 그런 니네베에 베푸시는 자비가 싫었습니다(3,1).
요나는 “나는 히브리사람이오!”(1,9)라며 이방인에 대한 우월감, 적대의식을 드러냅니다.
“니네베는 무너진다”라고 이야기할 때(3,4) “너희들의 잘난 도시도 끝이다”라는 조소도 배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니네베 사람들은 회개했고, 하느님께서는 니네베를 벌하지 않으셨습니다. 요나는 이를 언짢게 여깁니다.(4,2)
원수의 나라이자 적국이었으니까요. 그런 요나에게 하느님께서는 “네게 화를 내는 것이 옳으냐? 수많은 사람과 짐승,
성읍을 내가 동정하지 않을수 있느냐?”라고 물으십니다.(4,11) 요나서의 신학적 해석 중 하나는 구원의 보편성입니다.
저자는 이를 통해 이스라엘이 가졌던 신학적 폐쇄성을 비판합니다. 또한 하느님께서 자비와 사랑이 가득하심을 믿으면서도
이웃을 배척하고, 자비롭지 못한 우리에게 자신의 모습을 성찰하게 합니다.
신부족사회
프랑스의 사회학자 미셸 마페졸리는 부족사회로 회귀하는 현대사회를 언급합니다.
혈연이나 가계에 의한 과거의 부족제도가 현대사회에서 팬덤, 스포츠, 문화, 종교, 성별 심지어 정치와 경제, 인종, 지역 등
더 다양한 요소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이고 그 이면에는 합리성과 거리가 먼 정서와 감정, 유대감과 이해관계가
얽혀 있다는 것입니다. 미국 대선 사태, 혹은 국내 정치 상황에서 쉽게 보듯 합리성, 논리보다 집단이익,
양분화된 집단성이 강해 보입니다.
인간은 소속에 대한 갈망이 있으나 자칫 이것이 보편적 진리마저 위협할 수 있다고 진단하며
현대를 ‘포스트 트루스’(Post Truth) 시대, 탈진실 사회를 우려합니다. 하지만 “정치란 적과 친구를 나누는 것”,
“이기고 지는 게임”, “뺏기고 탈환하는 고지”, 나아가 “죽거나 살거나”로 여기는 과격한 이분법적 잣대만 남는다면
사회 전체적인 협력, 화합, 연대는 붕괴됩니다. 그러나 사회는 결코 승패만을 따지는 게임의 장이 될 수 없습니다.
승패가 아닌 공존과 상생이 사회의 목적이며, 인간 존엄과 공동선을 추구하는 가운데 올바른 협의와 대화가 지속돼야 합니다.
내일은 더 사랑할 수 있을까
그래서 오늘날 절실히 필요한 것이 바로 형제애,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입니다. 이해와 이익을 넘어서고,
진영과 사람을 쫓는 편협함이 아니라 하느님과 사랑의 위대함을 향한 거룩함입니다.
또한 보편적 의미에서 좋은 삶을 위해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본연의 품위입니다. 가톨릭 사회교리의 기본 사상도
바로 이와 동일합니다. 사회교리는 하느님의 사랑에서 흘러나온다고 합니다.(「간추린 사회교리」 3항)
그 사랑은 온전하고 완전한 구원에 대한 믿음, 충만한 정의에 대한 바람,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온 인류를
참 형제자매로 만들고자 합니다. 그래서 그 사랑이 세례를 받은 우리에게만이 아니라, 우리의 이웃, 우리 사회 곳곳,
정치와 경제, 기술, 노동, 문화와 예술 등 모든 실재에도 스며들어야 한다고 합니다.(1항)
또한 그런 사랑이 삶을 살아가는 방식이 돼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런 삶을 선택하는 사람입니다.
땅도 집도 모든 것을 돈으로 보려 하는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은 하느님과 형제애를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형제애,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정의입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교리를 강요하는 설전을 벌이지 않았습니다. 대신 하느님의 사랑을 전하였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무릅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교황 회칙 「모든 형제들」 4항)
[가톨릭신문, 2021년 3월 14일, 이주형 신부(서울대교구사목국 성서못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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