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수궁 돌담길을 거닐며
돌들이 소담스럽게 쌓인 덕수궁 돌담길을 따라 걷다 보면 그 돌들처럼 묵묵히
자신의 소임을 다하며 각자의 자리를 지키고 계신 분들을 마주하게 됩니다.
그 냄새만으로도 입 안 가득 침이 고이게 되는 ‘달고나’를 팔고 계신 노년 부부,
음주 전후에 먹으면 숙취효과가 좋다며 인심 좋게 맛보기도 시켜주시는
호박엿 장수 아저씨, 연실 “뻐∼어언!”을 외치시면서 주변의 이목을 끌고
쥐포도 좀 사 먹어 보라며 손짓하시는 후덕한 외모의 아주머니까지….
마치 함지 속처럼 높다란 빌딩 숲에 감춰진 이 정겨움과 사람냄새 나는
풍경들을 등경 위에 올려놓고 밝히 비추고 싶은 심정입니다.
그렇지만 그 돌담길에는 가슴 아픈 우리네 이야기들도 켜켜이 쌓여 있습니다.
시청 쪽으로 발길을 옮겨 보면, 서울광장과 청계천 일대에서는
연일 힘없는 우리 이웃들의 시위와 울부짖음이 계속되고 있고,
그 주위에는 경찰들과 그들을 가득 태운 버스들이 북새통을 이루며
일촉즉발의 위태로운 상황을 만들기도 합니다. 대한문(大漢門) 앞에는
오늘도 복직(復職)을 요구하며 억울함을 호소하고 있는 근로자가
추위를 견디며 앉아 있고, 그 앞으로는 버려진 상자와 폐지라도 수거하여
생계를 이어가려는 리어카 꾼이 지나갑니다.
그들 곁에 덕수궁 돌담길이 늘 함께 하고 있습니다.
어떤 때는 기대어 쉴 수 있는 안식처가 되고, 때로는 매서운 칼바람을 막아주는
방패가 되어 어렵고 소외된 우리 이웃들 곁에 말없이 함께 있어 줍니다.
덕수궁 돌담길을 거닐며
“굶주린 이에게 네 양식을 내어 주고, 고생하는 이의 넋을 흡족하게 하라”
(이사 58,10 참조)는 말씀을 묵상해 봅니다. 어떻게 하면
“세상의 소금, 세상의 빛”이 될 수 있을지 그 길을 찾아봅니다.
지금도 ‘달고나’를 팔고, 호박엿을 나눠주며, 행인들을 향하여 신명나게
“뻐∼어언!”을 외쳐대고 있을 그들이 덕수궁 돌담길에 머물고 있는 것처럼
제 주위의 좋은 분들도 그렇게 하느님 곁에 머물면서 서로 더불어 살아가고
있기를 희망해 봅니다. 바오로 사도의 복음 선포가
“성령의 힘을 드러내는 것”이었듯 세상을 향한 우리 이웃들의 당당한 외침도
‘사회정의’라는 큰 힘을 드러내는 것이 되었으면 좋겠고, 모두 행복하게
웃으며 내일을 이야기할 수 있는 날이 어서 빨리 찾아왔으면 좋겠습니다.
“네 빛이 어둠 속에서 솟아오르고, 암흑이 너에게는 대낮처럼 되리라”
(이사 58,10)는 하느님의 약속을 믿습니다. 성령께서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시기를 청하고, 성모님께서도 전구해 주시길 기도합니다.
수원교구
노성호 (요한보스코) 신부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