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님 제사상 위의 곰보빵 |☆...오순도순 나눔 °♡。
아버님 제사상 위의 곰보빵
어린 시절 서산에 해가 기울고
어둠이 내려앉기 시작할 무렵이면 어린 저는
마을 어귀의 신작로에 나가 비포장도로의
먼지를 꽁무니에 가득 매달고 달려올 버스를 기다리며
멀리 가로수가 늘어선 길을
고개를 길 게 빼고 바라다보고는 하였습니다.
이제 버스가 서면, 먼지가 한 바탕 휩쓸려 지나가고
입을 막고 차에서 내리는 사람들 중에
햇빛에 그을린 초췌한 모습의 아버지가
땀에 전 작업복 차림으로 내릴 것입니다.
제가 반갑게 뛰어나가서 안기면 아버지는
엷은 웃음과 함께 남루한 웃옷 주머니에서
찌그러진 곰보빵을 꺼내어 제게 주실 겁니다.
참으로 먹거리가 부족하던 그 시절의 곰보빵은
세상의 그 무엇보다도 맛이 있었기에
저는 너무나 아까운 마음에 그걸 한입씩 베어 물지 못하고
아주 조금씩 뜯어서 먹으며 집에까지 돌아오고는 하였는데,
누나도 그걸 보면 자신도 모르게 침을 삼켰지만
막내인 제 것을 빼앗아 먹지는 못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시간이 되어
큰길에 아버지 마중을 나가려는 저를
누나가 제지하며 못 나가게 하였습니다.
어린 저는 누나가 저 혼자서 아버지가 갖다 주시는
곰보빵을 먹는 것을 질투하여 그런 것으로 생각해
떼를 쓰며 억지를 부리다가 결국 누나에게 얻어맞고 말았습니다.
여섯 살 아래인 제게 누나가 손찌검을 한 것은
제 기억으로는 그때가 처음이었습니다.
떼를 쓰다가 매까지 맞고 눈물이 얼룩진 얼굴로
잠이 든 저를 안쓰럽게 바라보던 누나는 다음날,
지난밤에 아버지가 가져오신 곰보빵을
그대로 제게 건네주었고,
오후가 되자 제 손을 잡아끌고
트럭의 뒷자리를 얻어 태우고 읍내로 나갔습니다.
누나가 저를 데리고 간 곳은
어느 공사현장이었는데, 그 곳에서 우리는
무거운 질통을 등에 지고 힘겹게 이층까지 자갈과 모래를
실어 나르는 아버지의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얼마 후 인부들이 쉬는 시간에 새참으로
곰보빵을 나누어주는 게 보였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피곤한 몸을 벽에 기댄 채
맛있게 먹고 있었지만,
아버지는 그 빵을 이리저리 구경만 하다가는
작업복 주머니에 넣고는 수돗가로 가서 꼭지에 입을 댄 채
벌컥벌컥 수돗물로 허기진 배를 채우고 있었습니다.
그 빵은 바로 매일 저녁에 큰길까지 마중 나오는
저에게 주려고 아껴 두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어린 저는 당장이라도 달려가서
그걸 받아서 맛있게 먹고 싶었습니다.
그런 저에게 누나는..
"봤지? 너 때문에 아버지는 힘들고 배고픈데도
네게 갖다 주려고 매일 새참을 거르시는 거란 말야.."
하며 주의를 주었습니다.
결핵이라는 병으로 긴 투병생활을 하는 동안
가산을 탕진하고 어머니마저 돈을 벌어 온다고 집을 나간 후
소식이 없자 어쩔 수 없이 병석에서 일어나
창백한 얼굴로 노동판의 막일을 하시던 아버지는
밤마다 끙끙 앓는 소리를 내곤 하셨는데
그 모습이 철이 든 누나에게는
몹시도 안 되어 보였던 모양입니다.
그날, 서너 시간이나 걸려서 집으로 걸어오는 도중
누나는 허기져하는 저에게 싱아를 뽑아 주고
보리 이삭을 따서 비벼 주기도 했고,
다리가 아프다고 칭얼대면 버드나무 가지를 꺾어
껍질을 비벼서 빼낸 다음 버들피리를 만들어 주기도 했습니다.
그럼 난 얼마 동안은 '삘 삐리리'
그걸 불어대느라 흥이 나서 잘도 걸었죠.
마을이 멀리 보이는 데까지 왔을 때쯤
아픈 다리를 주물러 주며 누나가 불러주던 노래
'뒷동산 콩밭 갈 때 엄마 찾을 때 누나하고
저녁밥을 지어 놓고서 뒷동산 은행나무 밑에 앉아서
돌아오실 어머니를 기다렸다네' 는 지금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그날 이후 저는 곰보빵이 먹기 싫어졌다고 말했지만
아버지는 여전히 작업복 주머니 속에서
찌그러지거나 부스러져 버린 곰보빵을 제게 건네 주셨습니다.
아버지가 안 계신 지금,
당신의 제사상 위에 빠지지 않고 올라가는 곰보빵을 보며
제 자식들은 의아한 듯싶지만
아버지가 되기 전에야 어찌 그 마음을 알겠습니까?
아버지!
그렇게 허기진 뱃속을 수돗물로 채우시게 만들며
제가 빼앗아 먹었던 곰보빵을 이제라도 마음껏 음향하십시오.
- [행복편지]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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