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예로운 삶
글 : 손용익 그레고리오 선교사
사람들은 누구 할 것 없이 권력을 가지고 싶어 하고
권위와 영예를 얻으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영예와 권위는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선이 되고
악이 되기도 하여 때에 따라 편 가름이 되어 좌충우돌
싸움의 원상이 되기도 합니다.
권력이 남용될 땐 독재가 되고 적절한 권력이 없으면
세상이 문란해지기 때문에 권력은 정해진 원칙아래서
적절하게 사용되어야 모든 사람들이 정해진 원칙아래서
보호를 받을 수 있고 민주주의를 펼쳐나갈 수 있지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에서는 아직까지
권위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사회에서나 또 교회 안에서나 불평불만을 토로하고
외면하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기도 합니다.
자신의 생애에서 영애를 얻고자 한다면 자신에 주어진
권위를 과시하거나 남용하기보다는 벼가 익을수록
고개를 숙이듯이 겸손한 겸덕의 아름다움을 들어내며
자신의 주장을 내세우기보다 상대의 이야기를 충분히
듣고 그것을 이해시키기 위한 노력을 하는 사람에게
영예가 주어지지 않을까 합니다.
지금까지 역사를 돌이켜볼 때 위인은 국가를 위해서
자기 한 몸을 오직 나라 일에 염려하고 모든 백성의
안위를 생각하면서 헌신 하였을 때 위인이 탄생되었고
성인들도 부유한 생활을 버리고 하느님의 백성으로써
그 의무를 다하려고 한 사람들 중에서 성인이 탄생되어
왔습니다.
여름이면 사람들이 시원한 그늘을 찾고 겨울이면 따뜻한
양지바른 곳을 찾아 모여드는 이유를 생각해 본다면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영예로운 삶을 살 수 있을지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세속의 삶으로 부를 채우며 배를 두드리고 있다 해서
이웃이 그를 영예로운 사람으로 봐 주겠습니까?
순간적으로 부와 권력에 의해 사람들이 그에게 고개를
숙일진 몰라도 뒤돌아서서 손가락질하고 욕하는 원성은
끊이지 않을 것입니다.
언젠가는 그렇게 배를 두드리던 사람도 죽을 것이고
선량하게 살아간 사람도 죽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걷는 신앙 안에선 죽음이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현 세속의 삶이 죽음 이후 영원한 극락의 세계에서
평화로운 안식을 얻느냐 아니면 끝없는 고통의 단련을
받아야 하느냐 하는 갈림길이라면 과연 어떤 삶이 영예를
얻는 삶이 되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