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의 어린양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께서 ‘자기 쪽으로 오시는 것을 보고’ 이렇게 고백합니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요한 1,29)
‘하느님의 어린양’은 레위기 16장이나 탈출기 12장 그리고 이사야 예언서 53장을
더불어 읽고 묵상해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속죄와 구원을 위하여 어린양을
제물로 바치고 있었음을 알게 됩니다.
잠시 그 당시의 장면을 상상해 봅시다.
제사장은 경건한 복장과 성스럽고 치밀한 의식으로 한 마리의 어린양을 희생
제물로 바치고, 참여한 백성들은 감사와 안도 그리고 평안함을 느꼈을 것입니다.
죄는 자신들이 짓고, 속죄와 희생은 아무 상관없는 한 마리의 어린양을 제대에
바치는 것으로 대신합니다. 속죄양으로 대속(代贖)된 어린양의 들릴 듯 말 듯한
외마디 비명소리도 귓전에 남습니다.
우리 인간은 나를 대신할
이런 속죄양을 만들어 내는데 대단한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의 이름과 재산을 위해, 허욕과 자존심을 위해,
무엇인가 나 자신을 위해 끊임없이 속죄양을 만들어 냅니다.
어떤 때는 사람을, 어떤 때는 시간을, 수많은 핑계를,
나 말고 그 어떤 것이라도 대속 물로 사용합니다.
그리고 자신은 평안해질지 모르겠습니다.
내가 살기 위해! 나를 위해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께서는 그 속죄양의 모습으로,
스스로 세례자 요한 앞으로 다가오십니다.
세례를 받으신 후 앞으로 그 속죄양의 길을 걸으실 것입니다.
제자들을 위해,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았던 사람들을 위해,
나를 위해, 여러분을 위해 다가오십니다. 내 앞으로도 오십니다.
또다시 내가 당신을 속죄양으로 만들어도 되는 것처럼,
또는 다시 한 번 십자가에 못 박아도 괜찮은 것처럼, 나에게 다가오십니다.
이런 것이 구원자의 길임을 가르쳐 주러 오십니다.
이제 생각합니다. ‘나는 속죄양이 되어 줄 수는 없는가?’하는 것입니다.
내가 오해받기도 하고, 버림받기도 하고,
비천해지기도 하는 그런 상황은 용납될 수 없는 것인지요?
내가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그분이 가신 길은 분명, 그런 길인데
나는 왜 안 되는지요?
어느 날 나의 아픔과 비명으로 인해 다른 이가 살 수 있다면,
그래서 더 많은 생명이 살아갈 수 있다면, 이번 차례는
내가 속죄양이 된다 한들 그렇게 억울할 일만은 아닐 것입니다.
자유롭게 당신의 길을 걸어가시는 주님의 발걸음을 헤아려 보면서,
혹시 나에게도 있을지 모를
나의 무너짐조차 그분과 함께 걷는 길이라고 생각합시다.
내 인생 전체가 그 길을 따르기 어렵다면 이 한 주간, 어쩌면 이번
한 번만이라도 내가 속죄양의 길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서울대교구
강귀석 아우구스티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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