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을만한 사람
우리는 신뢰할만한 사람에 대해 여러 가지 정의를 갖고 있습니다.
“아, 그 친구 믿을만합니다. 그 친구 누나가 우리 사촌 형과 결혼했어요.”,
“그 친구 믿으셔도 됩니다. 저랑 고등학교 3년을 같이 다녔거든요.”,
“그 친구 믿을만합니다. 저랑 같은 교회 신자거든요.”
이렇게 혈연, 학연, 지연으로 대변되는 관계를 맺은 사람들을 대체로 미더워하는
것이 흔한 일입니다. 심지어 리더십의 자리에 오르면, 제가 들어야 할 이야기보다
듣고 싶은 이야기를 해주는 사람을 믿을만하다고 여기는 일도 빈번합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이제 점차 그러한 ‘관계중심의 사회’에서
‘원칙중심의 사회’로 이전되어야 합니다.
정작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고 약속을 지키는 사람’입니다.
아마도 실수를 인정하면 그 이후에 돌아오는 불이익을 막으려는 생각에서
대부분 숨기려 하지 않나 싶습니다.
그렇지만 혼자만이 알고 넘어가는 실수란 많지 않습니다.
곁에서 보는 사람들에게 그 실수는 다 보이기 마련입니다.
그러니 숨길수록 신뢰만 잃을 뿐입니다.
그런데 한 개인이 아닌 조직이나 회사, 공동체의 경우 구성원들이 서로 신뢰하는
집단이 되려면, 그런 품성을 가진 사람을 모아들인다고 되는 일이 아닙니다.
조직 내 구성원이 실수를 인정할 수 있게 너그러운 룰을 적용하고,
한번 한 약속은 반드시 지키도록 신뢰를 중요시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구성원은 점차 실수에 대해 인정하는 여유가 생기고,
약속은 지킬 수 있게 되니 믿을만한 사람들로 변해 갑니다.
아무리 품성 좋은 사람들을 모아놓아도 실수에 대해 가혹한 처벌을 하고,
약속을 해도 이런저런 이유로 지킬 수 없게 만드는 일이 빈번하다면,
품성 좋은 사람들조차도 점차 서로를 의심하고 믿지 않게 됩니다.
하느님과의 관계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싶습니다.
고백성사에서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고 하느님은 그것을 다 들어주시니,
이보다 더 실수를 인정하기 쉬운 일이 없습니다. 또한 고백성사는
또 다른 신앙적 성장을 위한 약속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느님은 그 모두를 인자하게 들어주시고 약속을 지키도록 도와주십니다.
그러니 하느님이 만들어 놓으신 룰 자체가
정말 선진화된 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백소에 들어서서 “휴, 사는 게 그냥 죄지요!”라고 하는 분이 있다고
우스갯소리들을 합니다. 이건 실수의 인정이 아니고,
자신의 실수를 하느님이 주신 생명에 전가하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고백은 늘 하지만 같은 죄를 계속 지으며 개선의 노력을 하지 않는 것은 실수를
인정하지만 노력을 안 하는 것이니, 결국 하느님과의 약속을 지키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도 하느님은 이런 우리를 다 믿어 주십니다.
실수를 인정할 수 있게 해주시고, 약속을 지킬 수 있게 도와주셔서 우리 모두를
믿을만한 사람이 되도록 해주시는, 정말 선진화된 룰을 가지신 분입니다.
박용만 실바노 / (주) 두산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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