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합/그때 그 시절

추억 속 그때 그시절|◈─……

수성구 2018. 11. 16. 03:44

추억 속 그때 그시절|◈─……그때♡그시절

 



지난 어린시절에는 위의 사진처럼 이발관에서 빡빡이 머리를 위하여 이발을 하였으며,

또한 현재와는 달리 그 시절에는 구두류도 모두 양화점에서 치수에 맞추어 착용하여다.

그리고 의류도 양복점에서 맞추어 착용하였던 시절이었습니다.



위의 사진은 아마도 지난 시절 군부대에 존재하는 매점으로 간판이 PX로 나타나고 있는데

지난 시절 PX에서 각종 물품을 구입할 경우 시중의 상가보다 면세품으로 가격이 저렴하였던 기억입니다.

그런데 그 PX는 바로 영어의 POST EXCHANGE의 약자로 알려지고 있는데

아마도 그 시절에 우편취급을 병행하여 그러한 PX로 표기하지 않았을까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위의 사진에서 살펴보면 황량한 벌판이 수도 서울이라니 믿어지지 않습니다.

물론 필자의 사무실 동료 중 3인이 서울에서 고교를 재학하였는데

그분들이 고교를 재학하던 시절에는 현재의 한반도 노른자로 알려진

강남과 서초 및 송파는 모두 무우밭과 배추밭 및 산악 지대로 알려졌으며,

잠실 또한 강변에 위치한 섬의 형태이었으나 개발되어 원주민들은 모두 밀려나버리고

이렇게 엄청난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위의 사진은 고궁에서 주민들이 한가하게 여가를 즐기는 모습입니다.

필자의 기억으로 몇년전에 가족동반으로 용인의 민속촌을 방문하였는데 정말 좋은 장소이었습니다.

물론 현재는 엄청나게 대규모의 각종 놀이공원 및 각종 시설이 존재하여

국민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고 있는 시설입니다.




위의 사진은 지난 어려운 시절에 우리의 국토를 지키기 위하여

외국군이 시보레 자동차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는 사진입니다.

물론 그 외국군들은 우리나라를 위하여 도움을 주기도 하였지만

사실은 그들의 나름대로 자국의 이익을 위하여 파병하였던 것으로 확신합니다.



도로변에서 무명옷과 대님을 매고 수염을 더부룩하게 길고

하얀 고무신을 착용하고 있는 노인의 모습이 무척이나 인상적인 모습입니다.

물론 우리들도 어린시절에 운동화가 아닌 보생산업의 타이어표

통고무신으로 검정고무신을 착용하엿는데

그 검정고무신은 마을앞 개울에서 물고기를 잡아 고무신에 넣고

자택으로 가져오고 그러한 고무신이 헤어지면 시장에서 수리하여 착용하고

수명을 다하면 엿장수가 나타나기를 학수 고대하였던 시절이었습니다.



우리의 정겨운 소달구지의 모습이다. 지난 시절에는 저러한 소달구지 및 우마차는

각종 운송수단으로 유용하게 이용되었던 시절이었으며,

일부 가정에서는 우마창가 이동하면서 대변을 보는데

그 대변을 수집하여 건조시켜서 연료로 이용하기도 하엿던 시절이었습니다.


 

위의 사진에서 목격할 수 있는 약국인지 약방인지 확인할 수 없으나

그 시절에는 약방은 조제권이 없었지만 알수 없는 알약을 분쇄시켜 고액을 지불하고

고뿔약[감기약]을 구입하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약방의 조제 행위는 분명히 불법적인 영업이었습니다.

하긴 그 시절 일부 주민들은 상처가 발생할 경우 약국이나 의료기관을 방문하지 않고

장독대로 이동하여 된장을 바르기도 하였으며,

두통시에도 이마에 빨간약을 바르기도 하였으니 정말 웃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어린 시절에 거주하는 주택은 대부분 초가삼간이었으나

지난 박총통 시절에 새마을 사업의 일환으로 대부분 슬레이트로 지붕 개량을 하기도 하였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러나 현재에는 그러한 슬레이트 주택은 대부분 사라지고

고향 마을에도 슬라브 주택이 등장하고 필자의 본가 뒷편에는 대단위 아파트 단지가 형성되고

마을이 골목길에도 가로들으로 인하여 불야성을 이루고 있으며,

재래식 하장실은 대부분 사라지고 수세식 화장실과 공동 우물도 사라지고 상수도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공동 우물에서 식수를 길어 나르고 각종 세착을 하는 것은 물론이고

밤에는 공동우물이 목욕탕이 되기도 하였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리고 매년 백중에는 마을에서 공동으로 우물물을 퍼올려서 께끗하게 청소를 하였으며,

각종 고기와 떡을 올려놓고 조사를 지내기도 하였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런데 약 2,000년전 베수비오 화산의 폭발로 이탈리아 남부도시 폼페이가 온통 화산재로 뒤덮혀 있었다가

발굴되었는데 그 시절에 폼페이에서는 무려 2,000년전에 수세식 화장실을 사용하는

모습을 영상으로 목격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빈민촌을 묘사하기를 달동네라고 하였는데

고지대로 가장 먼저 달을 목격할 수 있었기 때문으로 추측을 합니다.

그러한 달동네는 각종 주거시설 개편으로 이렇게 고층의 아파트가 우후쥭순으로 건축되는 모습입니다.

물론 우리의 맛과 예술의 고장인 빛고을에서도

지난 시절에는 아파트를 선호하지 않았지만 현재는 단독주택 소유자들이 매매를 학 어려운 지경에 이르럿습니다.

물론 현재는 고향의 시골 마을에도 아파트가 우뚝 솟아 오르는 실정입니다.



지난 어린 시절에 열차를 탑승하는 경우는 칙칙폭폭이라는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이동하는

증기기관차를 탑승하였는데 필자의

어린 시절에는 마을에서 친구들과 도보로 무려 약 4km를 이동하여

 현재는 사라진 죽림동 근처의 철도 건널목으로 이동하여 주머니에는

못을 가득 넣어 열차가 다가오기를 무작정 기다리다가 열차가 진입할 경우

철로에 못을 놓고 지나가면 그 못을 주워서 넓게 펴친 이것을 날카롭게 갈아내고서

조그만 소나무에 삽입시켜 칼로 대용하여 마을의 무우 및 고구마를 주인 대신에 수확하기도 하였으니

현재는 그 시절과는 달리 바로 주인드이 절도 혐의로 신고하여 어려움에 처하게 되는 시대입니다.



 

위의 사진은 차량이 가끔 지나가는 경우 온갖 흙면지를 휘날리는

신작로의 모습으로 가로수로 포플러 나무가 식재되어 있는 상태로

필자의 천년 목사골 마을에도 금천에서 봉황으로 이어지는 신작로가 존재하였으나

현재는 말끔하게 아스팔트로 포장되었으며,

교통량도 엄청나게 많은 상태입니다.

하긴 현재는 마을의 골목길은 물론이고

마을앞 농로도 모두 시멭트로 포장된 상태로 농민들이 편리하게 경작을 하고 있다.

위의 사딘에서 어느 할머니가 작무를 경작하는 모습이 목격되는데

지난 시절 우리의 부모님들의 모습으로 정말 안타까운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위의 사진은 주택 개량을 위하여 철거되는 건물 잔해를 안타까운 모습으로 바라보는

주민의 모습이 무척이나 인상적인 모습입니다.

하지만 이제 저 주민도 현대적인 시설을 갖춘 주택에서 문화생활을 경험하리라 생각하니

한편으로는 무척 밝은 미래가 약속되는 것이리라 확신합니다.

 

 


 

백의민족의 훙답게 상하의를 무색의 무명옷을 착용한 주민들의 모습과함께

넓은 비포장 신작로의 모습이 무척이나 인상적인 모습으로 목격되고 있다.

또한 좌측에는 처방 조제라는 약국의 간판이 우리를 반기고 있는 모습입니다.

그리고 맞은 편에는 군인들의 모습이 목격되는데

그 군인들의 군복과 군모는 지난 시절의 정품으로 무척이나 특이합니다.

물론 필자가 푸른 제복을 착용하던 시절의 군수품은 현재에 모두 사라지고

새로운 군복으로 교체되었으며, 병장 전역전에 수령한 봉급은 2,700원으로

거북선이나 태양이라는 담배를 5갑 구입하고 200원이 남았는데

현재는 이등병도 월급이 100,000원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져고 있습니다.


위의 사진의 도로변에 위치한 호수의 모습으로

어린 시절에는 이러한 호수 및 저수지에서 낚시를 즐기던 시절이었습니다.

물론 낚시대는 마을의 대나무를 이용하였고 낚시 바늘은 대중식당으로 명명되었던

대중상회에서 낚시바늘을 구입하여 묶어서 사용하였는데

지난 1967년 5학년 여름철의 어느날 한양 거주하는

동남이와 오강제 저수지 밑에서 낚시를 하여 붕어와 장어를 잡은 기억도 생생하게 뇌리를 스쳐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