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요산 원효대사와 요석공주의 사랑이담긴 굴
그러나 여자의 깊은 사랑은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변함이 없는법
원효대사의 자재무애의 수행에도 불구하고
원효대사을 사랑한 요석공주의 일념은 변함이 없었지요
요석공주는 원효대사가 정진하고 있는 소요산 입구에
별궁을 짓고 아들 설총과함께 원효대사을 연모했으며
그 터가 지금은 "요석공주별궁지"로 남아 있지요
그리고 동두천시는 이를 기념하기 위해
별궁지 옆에 요석공원을 만들어놓았고
소요산의 한 봉우리를 어여뿐
"공주봉"이라 부르며 기리고 있어요
또한 설총은 원효대사(아버지)에 대해
지극하고 각별한 효심을 가지고 있었지요
낙엽이 떨어지던 어느 가을 날 설총은
원효대사가 머무는 산사를 찾아가니
원효대사가 마당을 쓸고 있었어요
설총은 얼른 뛰어가 마당비를 받아들고
산사의 앞마당에 떨어진 낙엽을 깨끗이 쓸고 난뒤
“아버님 마당 다 쓸었습니다.”
라고 말을 하자 원효가 문을 열고 마당으로 나와
"정말 낙엽하나 없이 깨끗하게 잘 쓸었구나 !!"
하면서 마당 한쪽구석에 쓸어 모아둔 낙엽을 주워와
마당에 다시 뿌리며 설총에게 말하기를
"총아! 가을마당은 이렇게 낙엽이 떨어져 있어야 제격인 것이야 !!"
이 말을 남기고는 어데론가 홀연히 떠나가 버리자
설총은 원효대사의 선문답 같은 이 말 한마디에서
크게 깨달음을 얻었다고 하는군요
원효대사가 70세 되던해 음력 3월30일 열반에 들자
설총은 아버지가 못견디게 그리웠고
열반에 드신것이 너무도 가슴 아팠어요
그래서 아버지인 원효대사를 화장하고 난 후 남은 재와
진흙을 이겨 아버지의 모습을 빗었지요
그리고 아버지가 오래 주석하고 계셨던 분황사의 법당 한쪽에
소상(塑像:찰흙으로 만든 사람의 형상)을 모셔두고
아침마다 문안인사를 드렸어요
그러던 어느날 아침 여느때처럼 설총은
분황사 법당을 찾아가 문안인사를 드렸는데
원효대사의 소상(진흙상)의 머리가
옆으로 돌려져 있는것이 아닌가!!
분명히 정면을 바라보도록 모셔 놓았는데
원효대사의 소상(진흙상)이 머리를 돌리고 있으니
참으로 기이한 일이 아닐수 없었지요
그후부터 원효대사의 소상(진흙상)은 계속 설총이 아침마다
절을 하던 법당의 중간부분을 바라보고 있었다고 하네요
목을 돌린 원효대사의 소상은 고려 중기까지
분황사의 성보(聖寶)로 모셔져 있었으나
고려때 몽고군의 침입으로
분황사와 함께 불타버렸다 하는군요
재경안동향우회 南光浩 님이 올린글을 편집해 봤습니다
원효대사와 요석공주..
요석공주 - 3일간의 사랑으로,
신라의 십현(十賢)인, "설총"을 낳고
고승을 파계시킨 비련의 여인
당대 최고 고승-원효대사를
민중 품으로 인도한 대보살
요석(瑤石)공주,
한국이 낳은 최고의 고승 원효(元曉)대사를
파계시킨 사연 많은 과부 요석공주
후대인들의 기록에서는
요석과 원효의 관계를 ‘3일간의 사랑’으로 묘사하고 있다.
원효의 연인, 요석은 행복했을까,,,,,,,?!
삼국유사에는 요석의 목소리가
단 한마디도 등장하지 않기에
그 주변 이야기들을 통해
그녀의 마음을 헤아려보는 수밖에 없다.
원효는 신라의 수도 경주에서 어느 날
비틀거리며 거리에서 노래를 불렀다.
[수호몰가부,아작지천주]
``그 누가 자루 없는 도끼를 내게 빌려주겠는가,
그리하면, 나는 하늘을 떠받칠 기둥을 찍으리.``
아무도 그뜻을 아는사람이 없었으나
신라 태종무열왕이 이 노래를 듣고는
“대사가 필경 귀부인을 얻어, 귀한 아들을 낳고자 하는구나.
나라에 큰 현인이 있으면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없을 것이다”
하고서는 요석궁의 과부 공주에게
원효를 데려가라고 했다.
명을 받은 궁리(宮吏)가 원효를 찾으니
이미 남산에서 내려와, 문천교를 지나는 중이었다.
문천교에 숨어있던 나졸들이 원효에게
요석궁으로 갈것을 청하나
대사께서 껄껄 웃으며 거절하자
무예를 겨루어서 이기면,
대사의 뜻대로 하라는 나졸들의 뜻에 따르나
나졸들이 덤비는대로, 원효는
이들을 가볍게 들어 문천교 밑으로 빠뜨리고
마지막으로 남은 나졸마져 황황해지자
원효는 일부러 문천교 아래에 빠져
옷을 적시고는, 옷을 말리기 위해 요석궁을 찾아갔다.
3일간 요석궁에 머문 원효는
그 길로 궁을 나서고,
공주에게는 태기가 있더니
신라 십현(十賢)의 한 사람인, 설총을 낳았다.
...중략...
원효가 기거하는 혈사(穴寺) 바로 옆집에
설총이 살았으며,
원효가 죽은 후에는 사랑하는 아버지의 유골을
조상으로 만들어 분황사에 모시고
공경의 뜻을 표했는데,
어느 날, 설총이 예배하자 소상이 갑자기 돌아다보았다.
-〈삼국유사 원효불기조〉
설총이라는 존재는
원효와 요석의 관계를 유추하는데
커다란 실마리를 제공한다.
만약, 원효가
요석공주와 그 아들을 평생토록 내팽개치고
가장으로서, 아버지로서
그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지 않았다면,
그토록 아들이 아버지를 사랑할 수 있었으며,
후일 위대한 학자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아버지를 원망하는 어머니 밑에서 자란 아들은
결코 아버지를 자신의 표상으로 삼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또 아버지가 주석하는 절 바로 옆에 집을 짓고
늙은 아버지를 봉양하는 일은 더더욱 없었을 것이다.
더구나 설총은 불교학자가 아니라
신라를 대표하는 최고의 유학자가 되었다.
위대한 아버지의 그늘 밑에서
평생 그 그림자를 쫒은 것이 아니라,
그를 넘어서는 또 하나의 우뚝 선, 거목으로 자란 것이다.
이는 원효가 불교의 틀을 넘어선
대자유인이었음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설총 또한 사자에게서 태어난
또 한 마리의 당당한 사자였음을 반증한다.
“한 뭉치의 흙을 던지면,
개는 흙뭉치를 따라가 물지만,
사자는 던진 사람을 좇아가 문다”는
아함부 경전의 가르침처럼
원효에게서 배출된 아들은
아버지가 받아들인 불교를 배우는 대신
아버지가 불교를 통해 완성해낸
‘걸림이 없는’ 삶의 방식을 배웠던 것이다.
그 가운데 요석이라는 존재가
커다란 자양분이 되었을 것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분명 원효는
요석이나 설총만을 위해 살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처자식을 내팽개치고
자신의 이상만을 추구하는
이기적인 삶을 살지 않았을 것도 짐작이 가능하다.
‘아무 것에도 걸림이 없는 자는
한 길로 생사를 뛰어 넘는다’는
화엄경의 구절이 적힌, 호리병을 들고 다녔던
방랑객에게
성욕도 장애가 되지 못했거늘,
하물며, 처자식이 장애가 될 수 있었겠는가...!
오히려 요석은 원효로 하여금
아무 것에도 걸림 없는 삶을 열어준
최고의 도반이었음이 분명하다.
그녀의 크고 넓은 품은 원효로 하여금
청정비구라는, 법력 높은 고승이라는,
또 신라 최고의 엘리트라는
모든 ‘멍에’를 훌훌 벗겨주었던 것이다.
요석도 여인인 이상, 정인을 그리워하며
때로는 그리움에 사무쳐
눈물로 밤을 지새웠을 것이며,
때로는 절망이 불길처럼 번져
가슴을 새까맣게 태우기도 했을 것이다.
그토록 사랑한 사람인데
어찌, 마음 한구석에
조금의 원망과 설움이 없었겠는가.
그러나 흔들림 없는 사랑 앞에선
혼란의 폭이 조금씩 줄어들 수밖에 없는 것.
바위 같은 사랑!
그 사랑이 비록,
자신이 바라는 애착의 형태가 아닐 지라도
그 마음에 추호의 흔들림이 없다는
그 확신이 들어서는 경계에 이르면
그 사랑은 상대를 독점하겠다는 소유욕이 아니라
그의 존재를 인정하고
존경하는 원력의 에너지로 승화하게 된다.
그래서 좋은 남자는 좋은 여자를,
훌륭한 여자는 훌륭한 남자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겠는가...!
원효가 살았던 시절은
삼국통일이라는 거대한 이상을 위해
신라, 백제, 고구려의 젊은이들의 자신의 피를
제물로 바쳐야했던 혼란의 시기였다.
자식과 지아비를 잃은 신라인들에게
어찌, 승리감만 가득했겠으며,
나라를 잃고 노예의 처지로 전락한
백제와 고구려인들에게
어찌, 이해와 자비의 마음을 기대할 수 있었으랴.
이 혼란의 시기에 스스로 파계승이 된 원효는
주정뱅이들과 저자거리에서 노닐고
거지와 도적의 친구가 되었다.
그리고 그들에게 ‘나무아미타불’을 가르치며
한마음으로 생사를 뛰어넘는
대자유인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의 일승사상은 작게 본다면
고구려 백제, 신라가 둘이 아니라 하나이며,
크게 본다면
범부의 삶과 부처의 삶이 다르지 않음의 설파이다.
삼국통일이라는 혼란의 시기는
원효라는 위대한 고승을 배출했고,
그는 시대가 필요로 하는 자신의 역할을
정확하게 통찰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깨끗한 비구승의 모습으로
후대의 사표가 되는 대신,
민중 속으로 들어가는 보살의 삶을 선택했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요석공주는 원효를 사자좌에서 끌어내
민중 속으로 보낸 인도자에 다름 아니다.
자신을 위해 모든 것을 내던지지는 않았지만,
그녀를 통해 모든 것을 내던질 수 있었던
용기 있는 사나이, 원효.
그를 향한 그리움에 고통이 끊이질 않았다 해도
그녀는 커다란 그 기둥을 자신의 의지처로 삼았을 것이며,
그를 통해 보살도를 향한 구도의 열정을 불태웠을 것이다.
사실 원효는
그 누구보다 계율을 중시한 스님이었다.
그는 『보살계본지범요기』를 지을 정도로
계율학에 정통한 학자였다.
하지만, 그에게 있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