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義妓(의기) 계월향 초상화 발견
왜장을 죽이는 데 공을
세워 논개와 더불어 임진왜란
때 ‘2대 의기(義妓)’로 꼽히는 평양
기생 계월향(桂月香·?~1592)의 초상화가
발견됐다. “1815년 그린 것으로,그를
기리는 사당(장향각·藏香閣)에
걸고 1년에 한 번씩 제사를
지냈다”고 그림에는 적혀 있다.
그림을 감정한 안휘준 문화재위원장
(미술사)은 “전형적인 19세기 조선 미인도
”라며 “기생을 기리는 초상화가 발견된
것은 처음”이라고 했다. 훗날 우의
정에 추증된 김경서(1564~1624)
장군의 애첩이던 계월향은,
왜군 선봉장 고니시 유키나가
(小西行長)의 부장(副將)으로 평양성
함락(1592년) 때 ‘용장(勇將)’으로 꼽힌
고니시 히(小西飛)를 참수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여인. 적장이
죽은직후인 이듬해 1월 초,
평양성은 탈환됐다.
-계월향(桂月香)-
고미술품수집가 안병례(46)씨가
본지에 공개한 이 그림은 가로 70㎝,
세로 105㎝ 정도다. 일본 교토에서 최근
입수됐는데, 한지에 그린 채색화다.
임진왜란 때 적장의
목을 베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뒤 죽어 논개와 함께‘임진왜란
2대 의기(義妓)’로 꼽히는 계월향 초상화.
1815년 작품으로, 기생을 기린
초상화로는 처음 발견된
것이다. 논개의
초상화는 현재 전하는 게 없다.
옥비녀를 한 계월향은 반달 같은
눈매에 이중으로 된 옅은 눈썹,
도톰하면서도 오뚝한 코 등 전형적인
조선 미인이다. 안 위원장은 “저고리
길이가 짧고 소매폭도 좁은 등 몸에 착
달라붙는 상의로 당대의 패션 감각을 반영한
‘섹시한’ 느낌을 주면서도, 손을 ‘X자로 곱게
교차한 뒤 가슴에 찬 노리개에는
‘齋戒(재계·몸과 마음을 깨끗이 함)’
라고 적어 그를 현창한다는 의미를 더했다”
고 평했다. 얼굴과 옷주름에 음영을 잘
대비시키는 등 당시 조선 화단에서는
첨단 기법이던 서구의 명암법도
적극 수용해 그렸다.
그림 상단에는 ‘義妓 桂月香
(의기 계월향)’이라는 제목으로
그를 높이는 글을 한자로 빼곡히 적었다.
이 글은 계월향의 업적을 이렇게 적고 있다.
조선군사는 왜군들과
싸우다 전부 평양성을 버리고
밖으로 패퇴해 버렸다.
남은 백성들은 죽거나 노예같은
생활을 해야했으며
일본의 장수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는
평양탈환의 최선봉장으로
큰 공을 세운 고니시 히(小西 飛) 부대를
크게 칭찬하며 평양성에서
승리자의 기쁨을 마음껏 누려도 좋다고
허락했다. '말로만 듣던
조선 평양의 기방은 어떤곳일까...."
고시니 히 는 기방을 찾아
단번에 계월향의 미모에 빠져버린다 그리고
그는 그날밤 그녀를 취했다
‘고니시 히라는 뛰어난
장수가 (1592년) 평양성에
먼저 올라 우리 진을 함락시키니,
고니시 유키나가가 그를 중히 여겨
위임을 했다. 평양부
기생 계월향은 고니시 히에게
잡힌 뒤 귀여움을 지극히 받았지만
성을 빠져나가고자 했다. 그는
무관이던 김경서 장군을 친오빠라고
속여 평양성 안으로 불러들였다.
계월향은 그 뒤
‘남 논개, 북 계월향’으로
추앙받았다. 만해 한용운선생은
‘계월향에게’라는
시에서 ‘대동강에서 낚시질
하는 사람은 그대의 노래를 듣고
모란봉에서
밤놀이하는 사람은
그대의 얼굴을 봅니다.(중략)그대의
붉은 한은 현란한
저녁놀이 되어서 하늘 길을
가로막고 황량한 떨어지는 날을
돌이키고자 합니다’
라고 노래했다.
★ 기생의 유래.
봄에 처음으로 원화를 받들었다.
이보다 먼저 군신들이 인재를 알지
못하여 근심한 끝에 많은 사람들을 무리
지어 놀게 하여, 그들의 행실을 보아가지고
이를 증명하려고 하였다. 이에 아름다운 두
여자를 뽑았는데, 하나는 '남모'라 하였고,
다른 하나는 '준정'이라 하였다. 이 자료
는 우리 고문헌에 보이는 기생에 관한
최초의 기록이다. 즉 신라 진흥왕
37년에 처음으로 '원화'란 것이
생겼다는 기록이다. 원화는
본래 임금과 신하가 더불어 노닐
때에 술을 따르고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던 여자를 말하는 것인데, 이것을 기생으로
보는 견해이다. 이 주장대로 한다면 우리나라의
기생의 역사는 무려 1,400년이란 장구한 전통을
갖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기생'이란 명칭이
생긴 것은 고려 이후일 뿐 아니라 그 출신이
'원화'와는 아주 달랐었다.
★원화가 양갓집
규슈 중에서 얼굴이 아름답고 행동
거지가 뛰어나서 교양이 특출한
여자를 골라서 뽑는 데 반해, '기생'은
사회적 신분이 가장 미천한 '무자리'의 딸
중에서 뽑은 것이어서 [삼국사기]에 나오는
원화와는 전연 달랐던 것이다. '무자리'란 고려
태조 왕건이 나라를 창건했을 때 후백제의
유민 중에 많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이들은 삼국시대의 유민들로서
그들은 관적도 없었고, 천역도
안 하고, 다만 산천을 유랑하면서
수렵과 유기를 만들어 파는 사람으로,
현대적인 표현을 빌면 유랑민, 즉 일종의
집시 족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후에 이들을
노예로 하는 제도를 두었다. 이들 노비들의 딸
중에서 얼굴이 예쁜 애들을 골라 노래와 의술
을 배워주고 연회석에서 춤을 추게 하며,
필요한 때에는 높은 양반들의 잠자리
시중을 들게 하였는데, 말하자면
이것이 기생의 시초인 것이다.
엄격한 의미에서 말하자면
기생의 기원은 후백제의 유목민 중의
'무자리의 딸' 또는 '무자리'에서부터
시작된 것이다. 이렇게 보면 기생의
없었던 것이 아니다.
우리 기생 가운데 인상 깊은
인물을 꼽아 본다면 ‘시기(詩妓)’와
‘의기(義妓)’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시기는 시(詩)를 잘 지었던
기생을 가리킨다. 서화담과의
일화를 남긴 개성의 황진이(黃眞伊)
와 허균과 애절한 사랑을 나눈 부안의
매창(梅窓)이 여기에 해당한다.
황진이와 매창은 조선 여인의
지성과 예술혼을 상징
하기도 한다.
의기는 의로운 일을 하고
간 기생이다. 진주성에서 왜장
게야무라를 껴안고 남강에 투신한
논개(論介)와 평양성에서 김경서(金景瑞·
1564~1624) 장군과 협력해 왜장의
목을 벤 계월향(桂月香)을 꼽을 수
있다.논개와 계월향은 조선 여인
의 충절(忠節)을 상징한다.
이 4명 가운데 대중에게
가장 알려지지 않았던 인물이
바로 계월향이다. 시기로는 ‘남 매창,
북 황진이’요, 의기로는 ‘남 논개,
북 계월향’인데, 유독 계월향만
잊혀진 감이 있다.
엊그제 계월향의 초상화가
발견됐다는 보도가 있었다.
조선시대에 초상화는 아무나
그릴 수 없었다. 나라의 충신이나
퇴계나 율곡처럼 덕망이 높은 학자,
공적이 있는 대감들이나 초상화를
남길 수 있었던 것이다. 천민에
속했던 기생의 초상화가
남아 있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다.
사대부들이 계월향의 충절을 그만큼
높이 평가했다는 증거이다.
이와 같이 영정의 제작년도,
그려진 배경, 모셔졌던 장소, 주인공에
얽힌 일화 등 관련 내용이 함께 기록되어 있어
그 의의가 더욱 크다. 더구나 머리를 크게
올려 꾸민 형식, 저고리와 치마, 저고리
에달린 향노리개 등 당시의 복식
까지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의기 계월향 영정은 일반인과
미술사, 복식사를 연구하는 전공자에
큰 관심을 불러 일으킬 것이다.
1835년에 평양
의열사義烈祠가 건립되었는데, 이에 대한
기록이 '의열사의기
계월향비문'에 전한다. 이 의열사비는 평양감사
로 있던 정원용鄭元容이
1835년에 짓고, 김응근金應根이 써서 세운 것이다.
비문(碑文)에는 "정원용이
평양감사로 와서 늙은 기생 죽섭(竹葉)으로부터 의기
계월향의 이야기를 듣고
사적을 들추어 자세한 것을 살펴서 그의 공이 크기에
사당과 비석을 건립하고
춘추로 제향하게 하였다." 고 기록되어 있다.
이로 보아 의기
계월향 영정은 1815년에
그려서 평양 장향각에 모셔졌던 것은 확실하나,
이후 평양 의열사에
봉안하였는지는 분명하지
않다.계월향을 모시는 제사는 영정 제작시기인
19세기 초만이 아니라
후대에까지 매년 이어졌다
고 한다. 일제 강점기 <동아일보> 1921년
4월 26일자 기사에 "1921년
4월 22일(음력 3월 15일)
평양 의열사에서 평양기성권번(平壤箕城券番)
주최로 제수를 갖추어 제향하였다.
"는 기록이 있다.
-김응서 장군의 묘
"미천한 기생조차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조선, 다시는
침범하지 말지어다.
임진왜란 당시 '남에는 진주 논개,
북에는 평양 계월향'이었다.
둘 다 17세 소녀!
조선의 여성으로 시대를
선택한 인물은 모두가 조국과
민족을 생각하는 정신을 추모하며
등장한다. 그만큼 무능햇던 당대의
남성에게 던진 물음이었다. 이 영정은
2007년 일본 교토에서 한 고미술품
수집가가 구입한 것이다. 2008년
국립민속박물관이 구입하여
공개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