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의 모습
바라본다고 다 보이는 건 아닌가 봅니다.
지난 4월에 성 바오로 딸 수도회 수녀님이 이끈 영상 피정에 다녀왔습니다.
수녀님은 무심코 지나치기 쉬운 일상의 장면들을 카메라로 포착해
보여 주었습니다. 본듯 만듯한 모습들이지만, 보면 볼수록 의미가 깊어지는
그런 사진들이었습니다. 공원에 놓인 빈 벤치 사진에서는 누군가를 한없이
기다려 주는 기다림이, 푸르스름한 어스름 속에 피어나는 조명등 사진에는
언제까지나 함께 해주시는 하느님의 존재가 느껴졌습니다.
수녀님은 각자 자기가 좋아하는 사진을 고르게 했습니다.
저는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는 두 사람의 뒷모습 사진을 집었습니다.
한 사람은 앉아서 강 저편을 가리키고, 다른 한 사람은 서서, 가리키는 그곳을
함께 바라봅니다. 두 사람 뒤로 드리워진 나무와 숲 사이로 강물이 한가로이
흐르는데, 그들이 바라보는 그곳에는 강 물결이 햇살에 눈부시게 빛납니다.
그 사진을 제 책상 앞에 붙여 놓았습니다. 무심히 스쳐 지나듯 볼 때는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니 때로 강바람이 살짝 불어오기도 하고,
때로는 흐르는 물소리가 언뜻 들리기도 합니다.
“알아야 보이고, 사랑해야 느낄 수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아는 만큼 보인다.”라는 글도 있습니다.
어느 시인은 꽃씨 한 톨에서 우주를 들여다보고 시를 읊습니다.
현미경으로 보면 작은 미생물도 추상화와 같은 멋진 화면이 됩니다.
우리 주변 모습을 섬세하게 살펴보면 참으로 신비롭습니다. 이른 봄, 보도블록
사이를 비집고 피어나는 키 작은 민들레처럼 가슴 뭉클한 장면도 적지 않습니다.
단지 마음이 무디거나, 알지 못해서 보기 힘들 뿐입니다.
이따금 저는 지금 이 땅에서 예수님은 어떤 모습일까 상상해 보곤 합니다.
제 주위 어느 누구와 비슷하실까 그려봅니다.
‘사시는 곳은 아파트 단지일까? 단독주택?’
어쩌면 달동네 누추한 지하 골방에 머무시는 건 아닐까요?
‘어떤 차림일까? 명품?’ 한창 유행인 그런 옷차림은 물론 아닐 테고,
향수는커녕 짙은 땀 냄새를 풍기시진 않을까요?
‘함께 어울려 다니는 저분들은 누굴까? 무슨 일을 저질렀다고, 뭇사람들이 저리도
손가락질할까? 억울하게 끌려간 그곳은 어딜까?’ 그런저런 생각을 해봅니다.
제 마음속도 들여다봅니다. 고통, 미움, 분노, 욕심이 뒤범벅인 그 속에도
미처 알아보지 못한 신비로움은 없는지 찬찬히 살펴봅니다. 어쩌면 그 속에도
주님 모습이 비칠지 모르겠습니다. 주님 목소리가 울릴지도 모르겠습니다.
“주님께서는 온유한 이들에게 당신의 신비를 보여 주신다.”(집회 3,19)
김승월 프란치스코 / 시그니스 서울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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